최고의 진리는 상대성의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관념의 이원성을 넘어서 있습니다.
우리 존재의 가장 궁극적 본질은
어떠한 마음의 티끌에도 물들지 않는 순수한 빛입니다.
어둠은 빛을 가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존재의 본질에 대한 바른 통찰력을 얻은 사람들은
통속적 관념이나 가치 기준의 범주를 훨씬 뛰어넘은 호방하고 자유로운 삶을 삽니다.
그들에게는 속세와 열반, 미와 추라는 이원성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 자유로움이 곧 자비의 삶으로 굽이치게 됩니다.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붓다 틸로빠는
낮에는 깨를 갈아서 팔고 밤에는 창녀들의 포주 노릇을 했습니다.
우리의 가치관으로 보자면 그는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나 틸로빠가 왜 창녀촌에 갔는지 그 동기를 안다면
우리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곧 깨닫게 됩니다.
그는 창녀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그녀들의 응어리진 부분,
아픈 마음을 녹여주었습니다.
그들은 서서히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틸로빠의 사랑에 동화되어 갔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의 가슴 깊은 곳에 자각의 씨앗을 심어줄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영혼은 깨어났습니다.
틸로빠는 왕자였습니다.
그는 세상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출가하여 명상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진리에 대한 열망만이 깊어갔습니다.
그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했지만
궁극적인 빛이 동터오지 않아 마음속에서 이리저리 방황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나무 아래서 고요히 쉬던 중 오묘한 빛에 잠겨들었습니다.
몸도 의식도 사라진 채 축복에 잠겨 있는데
찬란한 빛의 모습을 한 스승 바즈라다라가 나타나 이런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생명의 빛이 거침없이 흐르고
지혜가 절로 꽃피도다.
초월과 현실이 하나인 곳
그대 마음이 사라진 그곳은
만물이 다 그대여라. 그대의 빛이어라.
그 순간 틸로빠는 바즈라다라의
가슴에서나오는 빛으로 흡수되었다가
마침내 바즈라다라와 함께 사라져 빛으로 녹아들었습니다.
이리하여 틸로빠는 상대세계와 절대세계, 세상과 명상,
윤회와 열반, 나와 너의 대립이 무너진 활짝 열린 진리의 세계를 깨달았습니다.
이전에는 세상을 버리고자 절간에 들어가 명상에 잠겼지만,
깨닫고 보니 현실 이대로가 생명의 합창이 장엄하게울려퍼지는 열반의 나라였습니다.
축복의 세계였습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싫어하고 구별하는 마음 때문에
절간에 집착하는마음 때문에
님을 보지 못했을 뿐 님은 항상 자기와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다시금 자신이 소홀히 했던
일상적 삶의 세계로 훌쩍 뛰어들어가
생활의 구구석구석까지 깨달음의 향기가 스며들도록 했습니다.
그는 앉아 있거나 특정한 장소에 가서 명상하던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대신 웃고 우는 고통받는 현실 속으로 뛰어들어가
그것이 그대로 명상이 되도록 했습니다.
자는 것, 먹는 거, 걸어다니는 것,
이야기하고 만나는 이 모든 것이 명상의 밑거름이 되었고,
자신의 자각과 사랑이 활짝 꽃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슬기와 통찰력은 더욱 깊어졌고 사랑은 더욱더 둥글고 원만해져 갔습니다.
그렇게 흘러가던 중에
창녀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바다 강의 <마하무드라의 노래> 중에서
http://cafe.naver.com/putifamen/354
삶을 사랑으로 이끄는 지혜의 경전
- "마하 무드라의 노래"
- 틸로빠 지음 / 한바다 강의 (양문)
< 마하 무드라 >의 노래는,
12세기경 깨달음을 완성한 구도자 틸로빠가 자신의 처절했던 구도 여정과
그를 통해 깨우친 지혜를 제자인 나로빠의 영혼 속에 불러준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후 세월을 거치고 인도 불교가 사라져가는 속에서도
이 노래는 마르빠, 밀라레빠 등과 같은 티베트 최고의 고승들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마하 무드라는 인간의 영혼이 이를 수 있는 가장 궁극의 경지입니다.
깨달음을 전하는 깊은 사랑의 밀지(密旨)인 동시에 전인간적인 삶의 완성을 전해주는 슬기로운 교향곡입니다.
이 <마하 무드라의 노래>는 어느 종교나 유파에 국한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간직해야 할 자유의 빛이자
모든 인간이 걸어가야 할 진리의 여정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차 례
서문
마하 무드라의 노래
노래 1 그대 실은 배는 어디로 가는가
노래 2 여기로 와서 대지의 노래를 들어보라
노래 3 마음의 뿌리를 잘라버리고 툭 트인 대지로 나왔네
노래 4 찾는 소는 그만두고 탄 소나 데려오게
노래 5 한 방울의 물이 대양으로 돌아가면
노래 6 오직 인류를 사랑하는 자만이 깨어나리
노래 7 세계는 원래 성스럽다
노래 8 그대 본인의 생명을 믿으라
노래 9 온 몸을 던져 배운 진실
노래 10 본성은 만유를 담고 있다
노래 11 아무 것도 아닌 자가 가장 큰 것을
노래 12 그윽한 가슴으로 태초 이전을 보라
노래 13 가슴의 부름을 따르는 이는 행복하다
노래 14 아픔을 거름삼아 꽃을 피우리
노래 15 바다로 굽이쳐 흐르는 강
노래 16 자발성의 넘쳐 흐름을 막는 것들
노래 17 본성의 등불
노래 18 내 이 땅에 온 것은 오직 그대를 만나기 위하여
노래 19 시간도 공간도 없는 기쁨 속에서
노래 20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라
오직 그대에게 바치는 글
물음과 대답
후기
서 문
먼저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모든 존재의 성장과 평화를 빕시다.
여러분 모두가 삶의 행복과 생명의 기쁨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바쁘고 고된 삶을 살아가다 보면 기쁨만 넘쳐 흐르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도 경험을 통해 잘 아시겠지만 한 존재가 성장해 가는 데는
환경과의 마찰로 인해 고통과 아픔을 느끼는 시기가 있게 마련입니다.
훌륭한 일들을 이루어낸 이들은 고통과 아픔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직접 맞닥뜨려 그 고통을 뚫고 나갔으며
거기서 얻은 저력으로 오히려 불사조처럼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올랐습니다.
그들의 여건은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었습니다.
만일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들이 고통을 성장의 디딤돌로 바꾸는 힘을 자기 자신 안에서 발견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얼핏 보기에 어둡고 부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상황들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늠연한 자세로 그것을 밝고 창조적인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요, 인류의 빛이 되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삶에 대한 지고한 사랑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삶이 주는 모든 희비극과 역경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깊이 겪었을 때
우주 만물과 생명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지혜가 자라났습니다.
그들은 삶에 대한 사랑과 슬기로 정성스럽게 미래를 가꾸어나갔으며
메마른 세상에 희망의 꽃내음과 평화의 물을 뿌려주었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이들의 진지한 자세와 슬기일 것입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함께 여행할 마하 무드라의 세계는
바로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천년 전 인도에서 인간 정신의 최정점에 도달했던
틸로빠(Tilopa)라는 한 뜨거운 인간의 가슴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영혼을 일깨우는 가슴의 노래 마하 무드라는
그 제자 나로빠(Naropa)를 거쳐 티베트 최고의 고승으로 일컬어지는
카규 맥(Kagu Lineage)의 마르빠와 그 제자 밀라레빠를 거쳐
현대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습니다.
나는 며칠 전 샴발라(Shambhala)라는 출판사에서 영문으로 번역된 <나로빠의 일대기>를 읽어보았습니다.
그 속에 이 < 마하 무드라의 노래 >도 함께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번역해 보았습니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인도에서는 이 노래가 완전히 사라졌고 티베트에 살아남아 지금껏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틸로빠는 지고의 깨달음에 대한 통찰과 깨달음이 일어나는 과정,
그리고 삶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일어나는 체험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아름다운 시의 형태를 빌어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나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국내에 널리 알려진 < 마하 무드라의 노래 >를 모두 감동적으로 읽어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나로빠의 전기에 실린 < 마하 무드라의 노래 >는 이제 읽어보시면 느끼시겠지만
국내에 소개된 내용과는 많이 다르고 또 원전을 전문 번역한 것입니다.
읽고 나서 전체의 흐름이 훨씬 명확하게 다가왔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으로 이 판본을 가지고 강의하기로 하였습니다.
시대를 초월해 감동을 주는 이 노래들에는 깨달음과 삶의 조화에 대한 보편적인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 마하 무드라의 노래 >는 깨달음을 완성한 틸로빠가
자신의 깊은 체험과 절실한 구도 여정을 통해 깨우친 지혜를 나로빠의 영혼 속에 불러준 사랑의 노래입니다.
8세기경 나란다 불교 대학을 중심으로 꽃을 피웠던 대승의 정신이 탄트라, 즉 금강승(剛乘)을 통해 확산되었는데,
12세기경 이슬람군이 침입하여 당시 불교의 거점인 나란타 불교 대학을 불태울 때
이 대학의 문헌을 지키려던 수많은 고승과 학승들이 나란타 불교 대학과 함께 타죽었습니다.
이에 인도 불교는 역사의 장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이를 예견한 수많은 고승들은
금강승의 많은 밀법과 문헌들을 티베트인에게 전수시켜
그 전통이 티베트에 흘러들어 감으로써 자비의 정신이 면면히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고승 중에서 나란타 불교 대학의 학장이었던 나로빠가 경전의 지식만으로는
큰 깨달음에 이를 수 없음을 계시를 통해 깨닫고 살아 있는 스승을 찾아 인도 전역을 헤매고 다니다,
틸로빠라는 야인과 만나 해탈의 심원한 뜻을 전수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틸로빠는 왕족 출신답지 않게
낮에는 깨를 갈아 팔고
밤에는 창녀들의 포주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모든 세인과 학자들에게까지 존경받던
당대 최고의 지성 나로빠가 한 이름없는 건달에게 배움을 청했을까요?
이것은 파격 중에서도 최고의 파격입니다.
나로빠는 틸로빠에게서 나오는 펄펄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힘과 순수한 가슴의 파장에 매료되었던 것이지요.
처음에 틸로빠의 가르침은 가혹할 정도로 파격적이었습니다.
나로빠는 수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때로는 수많은 번민과 외로움으로, 때로는 자기 혐오에 빠져 목숨을 끊으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큰 시련을 준 까닭은
지식와 허위 의식으로 지친 그의 몸을 살려내고
오만과 편견에 닫혀 있던 그의 가슴을 소생시키려는 틸로빠의 배려에서였습니다.
그 카르마들이 다 떨어져 나갔을 때
비로소 나로빠는 가장 심원한 해탈의 노래를 그의 가슴에 불어넣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동시에 틸로빠는 지혜의 눈으로 이 위대한 깨달음의 흐름을 이어받을 인연이 눈의 나라 티베트에 있음을 감지하였습니다.
때문에 머나먼 티베트의 한 위대한 영혼에게 법맥을 이어주어야 할
사명을 지닌 나로빠는 강하고 지혜로워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학자들처럼 앉아 명상을 하거나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몸을 끊임없이 움직여 진정한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슴으로 느끼게 되었을 때
틸로빠는 그에게 죽음의 명상법, 영혼 이탈의 비밀, 몸과 미세한 심령 통로에 대한 비밀스런 지식,
아유르베다의 변형인 영적 해부학과 탄트라 의학, 그리고 해탈의 밀지(密旨)인 마하 무드라를 전했습니다.
이 법맥은 나로빠를 거쳐
티베트의 마르빠에게로,
다시 티베트 최고의 각자였던 밀라레빠, 래충빠로 이어졌습니다.
카규파로 불리는 이 흐름은 처음으로 영국과 미국 등 서구에 불교를 전했던 보살 트롱빠에게로 이어져 왔습니다.
이 위대한 정신적 대하(大河)의 맥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2천 5백년 전 붓다의 깨달음이 그 발원지입니다.
흔히 불교란 세상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의 종교라고 생각합니다만 정말 그럴까요?
이는 제국주의자 아쇼카 왕 시대 이후 민중과 유리되기 시작한 일부 부파 불교의 영향일 뿐,
붓다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아니었습니다.
석가 당대의 장로들의 노래인 테라 가타(Thera Gatha)와
여성 장로들의 노래인 테리 가타(Theri Gatha)를 보면
삶 속에서 깨달음의 법을 실천하는 기쁨과 활력이 가득 차 있습니다.
석가모니 자신도 세상의 일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세 번이나 적에게서 지켜주었습니다.
또한 불교는 승려들만의 전유물처럼 착각되어 '일반인들은 접근하기도 힘들고 상관없는 것이다'라는 생각들을 합니다.
하지만 당대에는 일상 생활을 착실히 영위하면서 깨달음에 이른 제자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이런 오해들이 겹쳐 인류의 빛인 붓다의 메시지를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붓다 자신은 마음을 돌이켜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 복된 삶을 누리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종교나 문화 또는 철학적 소양과 상관없이
누구라도 붓다의 지혜를 양식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건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입니다.
누구라도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 생명의 근원을 밝힌다면
붓다의 가르침을 바르게 실천하는 일이 되며 붓다의 형제인 셈이 됩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붓다의 가르침이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은 사찰 불교의 권위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오해일 뿐입니다.
붓다께서 당시 민중 언어인 팔리어로 진리를 설파했던 정신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붓다는 결코 추상적이 아닌 객관적인 안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나는 철학자가 아닙니다.
나는 오히려 인간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의사입니다"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는 형이상학적 철학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인간이 고통스러워하는 존재라는 현실적 상황을 직시했던 것입니다.
즉 붓다는 사실상 당시 사람들이 가장 절실하게 느끼고 겪고 있던 것들을 말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이 땅에서 직접 겪는 마음의 고통과
상황에서 도망가지 말고 그것을 잘 직시하면
거기서 벗어나 평화를 찾고 밝은 삶을 가꿀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해의 한 원인으로는 우리가 받아들인 불교의 교리가 어려운 한문으로 쓰여져 있어
우리가 뛰어다니고 살아 움직이는 이 땅의 현실과는 단절되어 있다는 데도 그 까닭이 있겠지요.
팔리어로 된 근본 불교의 가르침을 번역해 놓은 것을 읽어 보면 그 차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노래의 당사자인 틸로빠와 나로빠가 속했던 탄트라, 금강승은
불멸의 지혜를 전하는 깨달음의 한 흐름으로 8세기 전후로 불교가 귀족 취향으로 변해
민중의 삶과 유리되고 더 이상 싱싱한 혼의 자각을 일깨울 수 없게 되었을 때,
붓다의 실천적인 정신을 계승하여 대중들로부터 시작된 명상의 흐름이었습니다.
금강승, 즉 탄트라는 삶과 유리된 초월된 열반을 따로 설정하여 거기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 땅의 삶에 역동적으로 뛰어들어 깨달음을 완성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땅이 바로 생명의 꽃이 피어나고 가꾸어져야 할 진리의 나라라는 사실을 직시했습니다.
금강승의 성자들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긍정하여 자신을 활짝 열고 나아감으로써
자기가 발딛고 있는 환경, 나, 세계 그리고
자신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장애든 도움이든-을
깨달음의 디딤돌이 되도록 만드는 창조적이고 실천적인 가르침을 제시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구도의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을 잘 소화시켜 마침내 독수리처럼 날아올랐습니다.
탄트라의 성자로는 목수, 승려, 대장장이, 학자, 사냥꾼, 주부, 창녀 등 실로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의 성향과 기질들도 각양각색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정열적이고 자비롭고,
또 어떤 이들은 게으르고, 도무지 고정된 유형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성향과 일상 생활을 명상의 도구로 변형시켜 삶을 완성시켜 나갔습니다.
수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그 가르침에 그만큼 보편성과 실천성이 강했다는 말도 됩니다.
그러므로 그 방법은 일상 생활을 영위하면서
현실을 꾸려가는 우리들에게도 큰 호소력과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은총은 마치 꽃의 향기와 같습니다.
장미와 연꽃의 향기는 그것을 맡을 수 있는 모든 생명들의 공유 재산입니다.
마하 무드라의 메시지 또한 그 어느 종교나 유파에 국한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간직할 자유의 빛입니다.
마하 무드라는 모든 인간이 걸어야 할 진리의 여정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하 무드라!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 이룰 수 있는 가장 궁극의 경지입니다.
그대의 의식이 저 북극성처럼 높은 곳에 도달했을 때,
너와 나의 모든 대립이 사라졌을 때 드러나는 구름 한 점 없는 투명한 내면의 하늘 그것입니다.
마하 무드라의 노래!
이는 대양과 같은 자비의 노래입니다.
마하 무드라는 헌신과 열림의 정점에 이른 제자의 가슴에 스승이 불어넣어 주는 생명의 그윽한 숨결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선택한 것은
인간의 의식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노래해 주면서
강물이 바다로 향하듯 궁극적인 삶의 목적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깨달음을 전하는 깊은 사랑의 노래인 동시에
전체적인 삶의 완성을 제시해 주는 지혜의 교향곡입니다.
이처럼 아름답고 심오한 세계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경외로운 일입니다.
이 노래를 지어 자비와 진실의 흐름이 굽이치게 한
틸로빠와 그 법맥의 여러 스승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엎드려 절합니다.
1998년 초가을 문턱에서 한 바 다
내면의 진실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 늘 아름다운 것만은 아닙니다.
이 길을 가다 보면 외로움도 많이 느끼게 되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에 눈을 떠서 가꾸어야 할 세상은 현재의 여기에 있습니다.
허심탄회하게 자신을 마주하는 사람만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마주하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일견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일들에서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이렇게 사소한 것으로 여기며 무시했던 일들이 해결될 때 비로소 풀려나게 됩니다.
우리가 수천 겁 동안 가지고 있는 카르마도 사실은 작은 일에서의 마음 씀씀이에 따라 달라집니다.
마음을 씀에 있어서도 정성과 사랑을 기울일 때 무의식의 혁명적인 변형이 일어납니다.
옛날 사람들은 자꾸만 "놓아라, 버려라"하였습니다.
이 때 버리라는 것은 세상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애착을 놓으라는 뜻입니다.
빈 배가 많은 사람을 담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허공처럼 비어 있으면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자유롭게 스며들고
상대방의 마음이 그 속으로 쉽게 흡수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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