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도 안 된 그녀의 바이올린에
자유롭게 곡을 리드하는 대가다운 여유나
강하게 활을 그어대는 남성적 에너지나
재기 발랄한 천재의 영감 따위가 얼마나 있는지
나로서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내가 몹시도 싫어하는
군데 군데 파여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길이나
피부를 자극하는 까끌까끌한 이태리 타올 같은
거친 소리만큼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람이 죽어버린 잔잔한 호수면이나
매끄러운 대리석의 표면처럼
소리의 윤곽에는 어떤 틈새나 굴곡도 없다.
High Fidelity
아무런 조작 없이
입력 그대로 출력하는 것이 Hi-Fi 최고의 미덕이듯이
정열이든 슬픔이든 또는 아무 것도 아니든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작곡가의 악보 속에 음표들로 채워졌기에
더 이상 뭔가를 더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녀의 소리는
구름같이 모인 대중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거물 정치가의 자신만만한 웅변이라기보다는
신랄한 비판이 난무하는 기자회견장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정부기관 대변인의 담담한 발표문 같다.
태산의 무거움도 아니고
활화산의 뜨거움도 아닌
서릿발 내린 벌판의 서늘함이기에
힐러리 한의 바이올린은
열정으로 발산하는 소리가 아니라
냉정으로 결정화된 소리다.
선이 가늘고 가벼우며 기복이 그다지 없이 밋밋하다고 느낄만한 소리라서 일반적인 우리나라 애호가들의 취향에 크게 어필할만한 연주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내한 공연이 있었는데, 아시아 지역 스케줄이 중국 4회, 일본 8회에 비하여 우리나라는 달랑 2회였고 그나마 자리도 다 차지는 않았던가 봅니다. 그녀를 무척 좋아하는 입장이기에 거리낌 없이 악평을 하자면 그냥 소리만 예쁘게 내준다고 할까요? 그러나 이런 맹물 같은 개성을 지닌 연주자가 음악 속에 녹아있는 아름다운 본성은 더 잘 드러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습니다.....ㅎㅎ
특히 브람스에서 오케스트라의 도입부 연주가 끝나고서 시작되는 약 2분 30여초 간의 솔로 바이올린에서는 그런 선율을 만들어낸 브람스와 내게 딱 맞는 소리를 들려주는 힐러리 한에게 경배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어느 거장의 앨범에서는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브람스의 아름다움을 이름의 무게로는 상대도 되지 않는 그녀의 연주에서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음악의 취향이란 절대적이 아닌 순전히 상대적이며 개인적이라는 생각과 함께 이후로는 명반이나 대가의 이름에 그리 구애받지 않는 태도를 가지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앨범입니다.
고클에 달린 어느 댓글에서 심한 공감을 느꼈던 것인데, 과거 우리나라의 중고등학교 음악교육의 문제가 작곡가들의 음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단순한 나열식 암기위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발터의 교향곡이나 아쉬케나지의 피아노 협주곡 처럼 힐러리 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었을 때도 고클의 그 댓글은 그런 느낌을 강한 확신으로서 선명하게 각인시켜 주더군요. 대추씨라는 별명을 가졌던 배영만이라는 개그맨의 표정과 손짓을 기억하시는 분들 계실 겁니다......^^
“어째서 브람스의 대표곡이 헝가리 무곡이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