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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 / 다산 정약용 & 다선 초의선사
시사종교 > 상세보기 | 2011-01-16 13:19:23
추천수 31
조회수   2,950

제목

성현 / 다산 정약용 & 다선 초의선사

글쓴이

김재용 [가입일자 : 2000-05-20]
내용
Related Link: http://blog.naver.com/kali9/100117753273



지금도 중국에서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상제'로 번역한다.

정약용은 상제의 본성을 표현하는 핵심적인 용어로

영명(靈明)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상제가 갖는 신령한 지각과 인식의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정약용은 성리학의 이기론을 벗어나서 만물을 주재하고

살펴볼 수 있는 영명한 하늘을 설명한다.





정약용 & 최한기(실학에 길을 묻다) 中

정약용 [ 1762-1836, 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을 지낸 실학자다. 호는 다산(茶山). 이이(李珥)의 주자학적인 실천 윤리와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등 북학파(北學派)의 사상을 집대성하고, 이기론(理氣論)에서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학설을 합성해 학문 체계를 세웠다. 주요 저작을 모은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가 있다.







철학 사상 [편집]



당시 주자학을 절대시하여 이기설(理氣說)·예론(禮論) 등의 논쟁에만 골몰하던 학계의 현실을 개탄하고 보다 참되고 가치있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학을 건설하기 위하여 한대(漢代) 이후의 오도된 유학을 거부하고, 공자·맹자의 원시 유학[16]으로 돌아가 유학의 본질을 파헤쳐 후인에 의하여 왜곡되고, 날조된 이론을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이이·유형원·이익의 경세학적 태도를 이어받아 새 시대의 새 학문을 건설하려고 하면서, 당시 중국에 유입되고 있던 서양의 종교·과학 등에 접촉하여 이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새 학문의 목적을 고증(考證)·경세(經世)·목민(牧民) 등에 두고 공자로부터 재출발하여 전연 독자적인 체계를 수립하였다.



천(天)을 유형천(有形天)과 주재천(主宰天)·역리천(易理天)으로 구분하고,

주재천에의 신앙을 강조하였다.



천명(天命)을 정치적으로는 인심(人心)으로, 윤리적으로는 정명(正命)으로 보아 백성을 위한 군자(君子)의 사명을 강조하였다.



주자의 천리설(天理說)과 이기설(理氣說)을 부정하고 천명이 도심(道心)에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인성론(人性論)에 있어 인간의 본성은 기호(嗜好)라는 성기호설(性嗜好說)을 주장하고, 사람에게는 도의지성(道義之性)과 금수지성(禽獸之性)의 양성(兩性)이 있음을 밝혀 이들 양자간의 갈등을 인정하였다.



인물성동이논변(人物性同異論辨)에 있어 한원진의 인물성이(人物性異)를 지지하면서도 기질(氣質)의 성(性)은 같되 본연의 성은 다르다는 새로운 입장을 취하고, 주자학의 기질지성청탁수박설(氣質之性淸濁粹駁設)을 부정하였다.



주자의 이기론(理氣論)을 전면 거부하고, 공자·맹자의 양기설(養氣說)을 다시 주장하고 이를 목민(牧民)사상과 연결지었다.



역리(易理)의 성립과정을 합리적·과학적으로 해명하여 음양(陰陽) 64괘(卦) 등을 미신적인 교리(敎理)로 보는 데 반대하였다.



성인(聖人)을 신격화하는 데 반대하고,



인간은 누구나 성(誠)을 다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공자의 충서(忠恕)·효제(孝悌) 이외에 자(慈)를 강조하여 윗사람의 아랫사람에 대한 의무·사명으로 하였다.



성정중화론(性情中和論)에 근거하여 예악중화론(禮樂中和論)을 전개하고 원시 유교의 왕도(王道)사상을 강조하였다.

요컨대 정약용은 한나라 이후 유학의 병폐·타락을 성리(性理)·훈고(訓話)·문장(文章)·과거(科擧)·술수(術手) 등 다섯 가지로 지적하고, 공자에게로 돌아가 보다 합리적이고 건전하며 실제적인 신유학(新儒學)을 건설하여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려고 한 주체적·혁명적 사상가였다고 할 수 있다.





[출처] 다산 정약용 |작성자 유연









어제밤에 뜬 보름달은 참으로 빛났다

그 달을 떠서 찻잔에 담고

은하수 국자로 찻물을 떠



차한잔에 명상한다.



뉘라서 참다운 차(茶)맛을 알리요

달콤한 잎 우박과 싸우고

삼동(三冬)에도 청정(淸淨)한 흰 꽃은



서리를 맞아도 늦가을 경치를 빛나게 하나니.



선경(仙境)에 사는

신선(神仙)의 살빛 같이도 깨끗하고

염부단금(閻浮檀金)같이 향기롭고도 아름다워라.









http://kr.blog.yahoo.com/vsv1254/605













<초의선사>







다선일미로 유불을 상통시킨



초의의순 초의 선사는 어려서부터 재기가 넘쳐서,



스승이 그에게 겸손하라고 지어 준 이름이 ‘풀 옷’에 해당하는 초의의순(草衣意恂)이었다.



초의 선사는 시와 그림에도 능하고, 꽃 기르고 장 담그는 데도 능하여 어느 것에든 능통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전한다.



한 가지 음식이라도 맛의 깊이를 온전히 깨치면 어느 요리든 맛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꽃이라도 그 성질을 깨쳐 온전히 키워 낸다면 분별심이 사라진 자리에서 능히 다룰 수 있다.



시서화가 일체라는 남종화의 가르침이 그러하며,



차와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는 다선일미에 대한 초의 선사의 가르침이 그러하다.



초의가 길을 열어 주어



소치가 추사에게 배웠던 남종화라는 장르도



원래는 중국의 남종선에 빗대어 붙여진 이름이었다.



실제로 19세기 유불 교류를 실천한 석학은 초의 선사였다.



동다(東茶)의 훌륭함을 예찬하는 동다송(東茶頌)을 짓고



다신전(茶神傳)을 지어 다성(茶聖)으로 불리게 된 초의 선사가 정약용을 처음 만난 것도,



정약용이 거소를 다산 초당으로 옮긴 이듬해였다.



다산이 해남 대둔사에 들렀을 때



당시 24세였던 초의선사는 장문의 시를 지어



정약용에게 바치면서 가르침 받기를 청하였고



이를 계기를 초의 선사는 정약용에게서 시와 경서를 배우게 된다.



그는 당시 최고의 진보적 유학자, 정약용의 영향을 받아 불교를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그의 실학적 불교 연구 태도는 진묵의 발자취를 추적한



《진묵조사유적고》나 《대둔사지》를 편찬한 것으로도 확인이 가능하다.



정약용은 그의 《대둔사지》 편찬에 참여하여 감정을 맡았으니



두 분의 교류는 학문적 교감으로 승화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초의 선사가,



유교의 가르침으로써 주자 성리학을



실학으로 전환시켜 현실 속에서 생생하게 완성시킨 위대한 유학자,



다산 정약용을 찾아 만나 인격적 교류를 하게 된 것은 유불의 상통(相通)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들을 횡단 매개로 이어 준 것은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차였다.



초의 선사와 다산 정약용이 실제로 교류한 기간은 약 9년이 되며



초의 선사가 다산에게서 경서와 시문을 배웠다는 흔적은 기록으로 전해진다.



초의 선사는 다산의 장자 유산보다는 두 살 아래였고 둘째, 운포와 동갑이었으니



초의 선사는 다산에게 아들처럼 여겨졌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리고 초의 선사가 훗날 추사 김정희나 해거도인을 만나게 된 인연 역시 이들 형제가 매개의 다리를 놓아 주었기 때문이다.



조선 말 한반도를 넘어 중국에까지 이름을 날린



국제적이며 천재적인 문인 추사 김정희와의 교분은 당대 석학의 만남이 되었다.



금담에게서 선을 배우고 윤우의 법을 이은 초의 선사는 삼학에 뛰어난 바 있으며 선교에 능통하였으니,



당대의 유불 교류는 쌍방 모두 자신의 경계를 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가 머문 대둔사로 불리는 대흥사는 깊고도 아름다운 사찰로서 초의 선사의 자태가 스쳤다고 할 것이다.



그 절 깊은 곳에 초의 선사의 일지암이 있다.



이 작은 초가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흔치 않은 다실의 전통을 보여 준다.



홀로 고요히 차를 마시다 보면, 유불의 경계가 사라지고 차의 맛만이 입안에 향기를 남길 뿐이다.



특히 초의 선사는 앉거나 서거나, 집에서나 뜰에서나, 아무 데서라도 차 한 잔으로 마음이 맑아진다면



따로 깨달음의 자리가 필요치 않다고 했으니, 차 한 잔의 깊이에 유불은 다 함께 녹아든다고 할 것이다.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가 사라지듯이…….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794

[출처] 초의선사 |작성자 허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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