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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가는 글이라 퍼왔습니다.
토론을 위한 글은 아니니 편하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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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나라, 박정희>오랜 친구면서도 곧은 소리 서슴지 않아
영욕 통음한 박정희 옆자리엔 고난과 눈물의 벗 육영수도 함께
2008-05-29 14:34:46
대통령 박정희를 욕하는 사람은 있어도, 그의 오랜 술친구이며 5.16혁명을 지지한 시인 구상은 깐깐한 문단사회에서도 존경을 받는다. 박정희의 허물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그 부인 육영수에게는 궂은 말을 못한다. 시인 구상과 대통령 부인 육영수는 그런 점에서 묘한 교집합(交集合)을 이루고 있다.
구상은 5.16혁명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거사 전에 신변의 위험을 느낀 박정희를 자기 집에 한달 가량 은신시켜 줌으로써 거사가 실패할 경우 중대한 국가사범으로 처리될 각오와 책임을 함께 짊어졌다. 무엇이 구상으로 하여금 위험천만한 모험에 동참케 했을까. 그 동인(動因)은 6.25전쟁의 피란지 대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육군 지휘부가 대구로 집결해 있던 그 시기에 국방부 신문인 승리일보 주간이며 종군작가단을 이끌던 구상은 육군본부의 작전교육국 작전차장이던 박정희 대령과 자주 어울려 술을 마셨고, 둘은 전쟁의 폐허에 깔린 지독한 가난과 참상 앞에서 우국(憂國)의 담론을 주고받으며 의기투합하였다.
필자가 시인 구상과 대통령 박정희에 관한 글을 책에 썼을 때(졸저 <임자 막걸리 한잔 하세>) 시인의 따님인 작가 구자명은 필자에게 “아버지가 ‘인간 박정희’를 좋아하셨지 그 시대 정치를 좋아한 건 아니다”라고 했다.
둘 사이는 인간적으로 가깝되 정치사회적으로는 먼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구상은 5.16을 구국의 혁명이라 했다. 남들이 침묵할 때 주저없이 5.16을 정의했다. 헌정을 중단시키고 권력을 잡는 것으로 혁명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5.16이라는 격동의 시점을 넘어 구국의 실천 수단으로 적어도 정치를 필요악으로 인정하되, 그러나 그가 그 험한 세월에 정치의 어두운 부분까지 동조할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1974년 2월 일본의 문학 행사에 참가했던 문인들이 그곳의 재일동포 잡지 발행인과 식사를 했다가 졸지에 간첩으로 몰리는 황당한 사건이 있었다. ‘문인간첩단사건’이다. 무지막지한 정보당국이 무고한 그들을 간첩으로 엮는 데는 유신 정치에 대한 저항을 억누르기 위한 복선이 깔려 있었다.
법정에서 그들의 무죄를 말해 줄 용기있고 유력한 증인이 간절히 기다려졌지만 누구도 거기에 대통령의 친구인 구상이 나오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나선 것이다. 그가 증언대에 서는 것을 보고 후배 문인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놀랍고 가슴 뜨거운 감격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굵고 낮은 음성으로 차분히 그들의 죄없음을 증언함으로써 그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당국의 ‘죄’를 꾸짖었다. 박정희라면 몸을 부르르 떠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임헌영도 그때의 구상을 가리켜 ‘구도자의 미학을 실현한 시인’이라고 했음에랴!
그러나 구상이 구도자로 받드는 어른이 따로 있었다. 공초 오상순. 공초가 마지막 담배 꽁초를 놓고 눈을 감았을 때 구상이 친구 박정희에게 말해서 수유리 빨래골에 묏자리 1백평을 마련했다. 아마도 ‘박정희 빽’을 써먹은 것이 그때가 유일했을 터이다.
구상, 그는 조용하고 용기있는 선비였으며 정에 약한 휴머니스트였다. 박정희가 제의하는 관직을 마다하면서도 문단의 어려운 사정을 위해서는 앞에 나서서 ‘이름팔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자기 주머니를 털어 그들을 어려움으로부터 건져내곤 했다.
◇ 이중섭 작 ‘K시인의 가족’(1955년). 구상 시인이 자녀들에게 세발자전거를 사주고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경북 왜관 낙동강변에 있던 구상의 집에서 식객으로 있던 이중섭이 구상 가족을 부럽게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을 오른쪽에 함께 그려넣었다. ⓒ구상문학관
공초 오상순과의 인연도 대구 시절부터였다. 그는 그 허무와 절망의 피란지에 모인 문화예술인들을 만나 밥을 사주고 술을 사주며 아픔을 함께 부둥켜안고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하고 내일을 꿈꾸었다. 신문사의 어엿한 월급쟁이에다가 부인이 병의원을 개업하고 있어 곤궁한 문화예술인에게 그야말로 쩍말없는 밑천이 되어 주었다. 그런 그에게 가장 가슴 아프게 흔적을 남긴 사람이 화가 이중섭이었다.
이중섭이 “너무 비참하게 살다가 가엾게도 너무나 빨리 세상을 떠났다”고 구상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를 먹이고 재우고, 여인의 분냄새가 나는 풍류도 안겨주면서 알뜰히 보살폈다. 구상이 아니었으면 더 일찍 가버렸을 이중섭이었다. 이중섭의 천재성을 알려서 그를 죽어서나마 호강을 시킨 것도 구상이었다.
구상은 이중섭이 남겨준 그림 한점을 호암아트홀에 팔았다. 삼성측 관계자와 중개인이 구상의 거처인 여의도 시범아파트로 가서 거래 절차를 끝내고 돈을 내놓았다. 구상은 그 자리에 동석해 있던 제3자에게 금액을 확인토록 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가지고 가서 잘 운영해 봐요.”
구상이 손도 대지 않고 건네주는 엄청난 돈을 받아든 제3자는 경북 칠곡에 있는 양로원 관계자였다. 구상은 그 양로원 후원자였다. 그것을 알고 중개인은 제 몫인 기백만원의 중개료를 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구상이 대통령 박정희와의 오랜 교분을 먼발치에서나마 끈끈히 하고 있는 것을 맘속으로는 못마땅하게 여길지언정 대놓고 쓴소리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박정희 시대에 등을 돌리고 살았던 사람들도 그에게 험한 말을 못했다.
박정희는 욕먹기로 작정하고 역사에 등장했다. 욕먹는 사람의 친구도 같이 욕을 먹기가 일쑤이건만 구상은 그렇지가 않다.
박정희의 옆자리 육영수도 그러하다.
박정희가 선거에서 얻는 표의 30퍼센트는 ‘육영수표’라고 했다. 그래서 “대통령도 부인 하기 나름”이라고들 말했다.
그 시절 선거 유세장에서는 특이한 장면이 있었다. 단상에서 한창 연설을 하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이 대통령 부인의 손을 잡아보려고 다가오는 것이다. 운동장에 마련된 높은 단상 아래로 와서 까치발을 하고 팔을 뻗으면 단상의 육영수는 허리를 굽혀 그 손을 잡아주어야 했다. 그 아주머니들은 그냥 손을 잡아보고 싶을 뿐인 것이다. 수사(修辭)가 필요치 않다.
청와대를 방문한 재미교포가 대통령 내외와 함께 둘러앉은 식탁 앞에서 느닷없이 “각하, 장가 참 잘 드셨습니다”라고 해서 그를 안내한 사람이 한순간 등줄기가 서늘했다고 한다. 일행이 모두 깜짝 놀랐다가 폭소를 터뜨렸고, 그 발칙하고 배짱좋은 유머의 감칠맛으로 식탁 분위기가 한결 유쾌했다는 것이다.
대통령 부인 육영수를 추도하는 날 8월 15일은 매우 덥다. 그날에도 특이한 장면이 있다. 행사를 위해 나온 의장대 장병들이 땀을 비오듯 흘리며 부동자세로 서 있는데, 아주머니들이 손수건으로 그들의 땀을 닦아준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의장대 장병들은 부동자세로 서서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눈만 껌벅일 뿐이다. 말을 주고 받아야 마음을 아는 것은 아니다.
육영수가 있는 곳에는 맑고 고운 흐름이 있다.
육영수 시절의 청와대에서는 내로라 하는 정치인이나 유명 인사가 아니라도, 또 외국에 나가 국위를 선양한 운동선수나 문화예술인이 아니라도 특별히 초청하는 대상이 있었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섬의 어린이들이다.
어느 하루 그와 관련된 신문기사를 보고 검은테 안경의 신사가 서울 충무로의 다방으로 나갔다. 그는 가방에서 신문을 꺼내 거기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검은테 안경은 작곡가 박춘석이었고, 또 한 사람은 작사가 정두수였다.
정두수는 ‘흑산도 국민학교 어린이들의 소원 서울 수학여행 이뤄지다’라는 제하의 기사를 읽었다.
바닷물이 푸르다 못해 검어서 이름도 흑산도라 했다. 옛부터 사람 살 곳이 못된다던 유배와 절망의 섬은 그때만도 육지와 아득히 떨어진 고도(孤島)였다.
섬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그곳의 까까머리와 단발머리들이 대통령 부인이 주선해준 해군 함정을 타고 최초의 수학여행을 서울로 가게 되었으며 청와대까지 구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었고 신문이 크게 보도할 만큼 대단한 화제가 아닐 수 없었다.
작곡가와 작사가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생각을 섬 아가씨의 한(恨)으로 녹여 노래를 만들었고 그것을 가수 이미자가 불렀다. 대중가요 ‘흑산도 아가씨’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1966년 9월13일, 청와대 대접견실에 온 26명의 흑산도 졸업반 어린이들은 까칠한 피부에 영양상태가 좋지 않은 모습이어서 대통령 내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청와대에서는 그들을 위해 따로 정원의 식탁에 음식을 마련해 부끄럼 타지 않고 자유롭게 먹을 수 있도록 했고, 학용품 선물 외에 학교에 라디오, 녹음기, 피아노를 보내주기로 했다. 그리고 섬 주민 1백여 가구에 광목 한필씩 돌아가도록 했다. 또 어린이들의 발육상태가 기생충 감염 때문에 나쁘다는 말을 듣고 구충제를 함께 넣어주었다.
◇ 5.16후 처음 그가 사랑하는 삶의 현장에 모습을 보인 육영수 여사.1961년 10월21일 서울 마포의 유린(有隣)고아원을 방문, 좌절과 빈곤의 세파(世波)에 버림받은 동심(童心) 앞에 허리 굽혀 눈높이를 맞추고 있다. ⓒ국가기록원
대통령 부인 육영수의 손길은 그늘진 곳에, 외로운 곳에 많이 닿아 있다.
전남 완도읍에서 12마일 떨어진 장도의 어린이들이 초등학교 분교를 마치면 완도의 중학교로 가고 싶어도 배가 없어 진학을 포기한다는 소식을 듣고 육영수가 돈을 마련해 보냈다. 그러자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돈을 보태 통학선을 샀다. 청와대에서 마련해 주었다고 이름을 ‘청와호’라고 지은 그 배로 40여명의 어린이들이 중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 것이 1968년의 일이다.
외딴섬에서는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는 것 또한 큰 어려움이다. 서해 낙도의 환자 수송을 위한 병원선 ‘백련호’도 육영수가 나서서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배를 기다리던 섬주민들은 대통령 부인의 별세 소식을 먼저 들어야 했다. 배의 건조를 주문해 놓고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대신해 따님 박근혜가 1974년 9월 ‘백련호’의 진수식 테이프를 끊었다.
고려대 교수 김용준은 세미나에 참석하러 일본에 가서 TV 뉴스를 보고 대통령 부인의 죽음을 접했다고 한다. 일본 교수들은 김용준이 반체제 인사임을 아는지라 그중의 한 사람이 TV 뉴스를 아주 통쾌하게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김용준은 정색을 하고 그에게 말했다.
“나도 박 정권을 좋아하지 않지만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박정희이고 죽은 사람은 우리나라의 퍼스트레이디다. 사적인 감정을 떠나 나라의 상징적 대표가 죽었는데 한국 사람인 나를 앉혀놓고 그런 얘기하면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그러자 그 교수가 무릎 꿇어 사죄를 했고, 김용준은 나라가 오죽하면 이런 꼴을 당하는가 싶어 울음이 나왔다고 했다. (동아일보 2005년 10월18일)
김용준은 함석헌의 제자이다. 서슬 퍼런 군정시절 박정희 앞에 고개 바짝 쳐들고 따끔한 충고를 던지던 함석헌의 제자, 씨알의 사상이 알알이 박힌 심장을 갖고 있는 김용준이다. 함석헌은 외국에 나가 반체제 발언을 일절 하지 않았다. 국경을 넘으면 국가를 욕보이지 말라는 것이다.
대통령 박정희는 한 시대의 영욕(榮辱)을 통음(痛飮)했다. 욕을 먹기로 작정해서 5.16 새벽에 한강을 넘었고, 욕을 먹어도 일본과의 국교수립과 청구권 자금을 해결했으며, 가당치도 않다는 경부고속도로와 종합제철 프로젝트를 욕먹으면서 추진했고, 3선개헌과 10월유신으로 독재자라는 오욕으로 포장된 정치 이정표에 새마을운동, 중화학공업, 전자공업의 성적표를 막걸리 마시듯 욕사발을 들이키면서 차곡차곡 기록해 나갔다.
시인 구상은 그런 친구의 10.26서거 소식을 접하고 그를 하느님 앞에 보내며 다음과 같은 진혼축(鎭魂祝)을 썼다.
국민으로서는 열여덟 해나 받든 지도자요
개인으로는 서른해나 된 오랜 친구
하느님! 하찮은 저의 축원이오나
인류의 속죄양, 예수의 이름으로 비오니
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고이 쉬게 하소서. 이 세상에서 그가 지니고 떨쳤던
그 장한 의기와 행동력과 질박한 인간성과
이 나라 이 겨레에 그가 남긴 바
그 크고 많은 공덕의 자취를 헤아리시고
하느님, 그지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
설령 그가 당신 뜻에 어긋난 잘못이 있었거나
그 스스로가 깨닫지 못한 허물이 있었더라도
그가 앞장서 애쓰며 흘린 땀과
그가 마침내 무참히 흘린 피를 굽어보사
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길이 살게 하소서.
그의 신앙은 가톨릭이다. 그는 망자가 가차없이 매도를 당하던 10.26 후 5년 동안 홀로 망자를 위한 제례 미사를 올렸다.
그에게 박정희는 전쟁으로 초토화된 땅에서 만난 술친구였다. 박정희를 그냥 “친구”라고 말했다. 군시절의 박정희를 강원도로 어디로 “찾아가 놀았다”고 했다. 그의 시가 그러하듯 그의 말도 기교나 겉꾸밈의 치레가 없다. 순직하고 간명한 언어로 박정희를 말한다.
“내가 인간을 아는데 굳이 그가 깨끗하다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 의리있는 남자라고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도둑질 안할 사람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는 흐르는 물을 바라보듯 박정희 시대를 관조하면서 옛 친구에게 인생과 국가를 위한 기원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한 자기 모습을 친구의 진혼축에 선명한 배경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의 기원에 어긋나지 않게 박정희는 대한민국을 바꾸어놓았다. 세계 각국의 교과서는 ‘6.25전쟁’으로 도배되어 있던 한국을 ‘경제’로 바꾸었다. ‘프레지던트 박’을 주목하고, ‘만만디’의 나라 중국도 ‘퍄오정시’(朴正熙)에 눈을 떠 ‘콰이콰이’(빨리빨리)를 외치고 있다.
라스베이거스 한복판이나 모스크바 대통령궁과 마주보고 있는 빌딩 꼭대기의 한국상품 광고를 보면서 이젠 반가움도 시들어 무덤덤해진 한국인들이다. ‘새마을운동’이라는 고유어가 브리태니커사전의 표제어로 오르고, 프랑스 대입 논술시험문제에까지 출제된 그 새마을운동을 베트남의 관리들이 배우러 와서 박정희 구미 생가를 찾고 있으며, 그 나라 공산당 서기는 박정희 전기를 읽다가 베트남 파병을 앞두고 밤새 담배 네갑을 피우며 고뇌하던 한국 대통령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노라고 고차원의 고백을 하고 있다.
박정희는 역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대에는 욕을 먹더라고 역사가 올바른 평가를 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세계사의 걸출한 인물들에게서 보듯이 역사가 그들의 하찮은 허물을 정화시켜 버리고 인간사회와 국가를 위한 공덕을 치켜주어 반짝이게 한다는 것을 박정희는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 그가 분명히 알고 인정하는 것이 부인 육영수의 역할이었다. 당대에 박정희의 욕을 무던히도 지워준 사람이 부인 육영수였다. 지도자 박정희는 육영수에 의해 다듬어진 부분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육영수의 옆자리에는 가난하고 그래서 서럽고 외로운 사람들이 있었다. 좌우 양쪽에 대통령 남편과 어려운 이웃들이 있었다.
시인 구상도 옆에는 술친구 박정희와 어려운 이웃들이 있었다. 어려운 이웃들 속에서 구상과 육영수는 만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