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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권하면 기득권층만 즐겁다
2008-04-08 오후 4:26:59 게재
기권하면 기득권층만 즐겁다
유승삼 (언론인)
18대 총선 투표율이 역대 최저가 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중앙선관위가 지난 3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반드시 투표하겠다”는 응답은 63.4%에 머물렀다. 이대로 가면 실제 투표율이 50% 초반에 머물 가능성이 있다는 걱정들이다.
투표율이 낮으면 당연히 민의가 왜곡된다. 가령 어느 지역구의 투표율이 50%에 그치고 당선자의 득표율은 40%라면 그 당선자는 불과 20%의 지지만으로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다. 나머지 80%의 민의는 누가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물론 ‘기권도 의사 표시’라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왜 투표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보면 기권은 자주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기보다는 현실이 ‘강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번 중앙선관위 조사에서 투표할 생각이 없는 이유로는 ‘투표해도 바뀌는 게 없어서’ 36.1%, ‘정치에 관심이 없어’ 22.1%, ‘마음에 드는 후보가 없어’ 15.4%, ‘후보를 잘 몰라서’ 11.2% 등인 것으로 나타났다. 정치에 대한 실망감과 혐오증, 또 그에 뿌리를 둔 정치적 무관심이 투표를 안 하는 주된 원인인 것이다.
무임승차심리가 기권 낳는다
미국의 의료보험제도의 비인간적· 탐욕적 측면을 신랄하게 비판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에서 토니 벤이라는 전 영국 노동당 의원은 이렇게 말한다.
“자유가 있어야 선택도 합니다. 빚에 묶여 있으면 선택할 자유도 없죠. 빚 때문에 절망적이면 투표를 안해요. 모두들 투표하라고 말들은 하죠. 하지만 빈민들이 일어나 그 대변자에게 표를 던지면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납니다. 그걸 원치 않으니까 그대로 두는 겁니다.”
정치에 대한 실망감, 혐오감, 무관심과 기권 심리는 누가 만들며 그 희생자가 누구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하는 말이다.
토니 벤의 말은 맞지만 현실에 모든 책임을 떠넘길 일만은 물론 아니다. 이기심에서 비롯된 무임승차심리가 기권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도 분명하다. 미국은 총기 소유가 자유여서 해마다 끔찍한 사고가 빈발한다. 해서 다수 국민은 총기판매금지 법안에 찬성한다.
그러나 막상 스스로 나서 반대운동에 나서는 사람은 적다. ‘나 아니라도 다른 사람들이 나서서 해결하겠지’ 하는 기대심리 때문이다. 그 결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똘똘 뭉쳐서 적극적으로 로비하는 이익단체들에게 판판이 패배하고 법안은 해마다 표류하고 있다. 교정에 마련된 부재자 투표함마저 외면하고 투표일에 MT를 가는 대학생들의 심리가 바로 무임승차심리의 좋은 보기이다.
기권의 주된 원인이 기득권층의 의도적 방치 때문이건 무임승차심리 때문이건 아니면 여러 가지가 복합된 것이건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기권은 결과적으로 기득권자들만 즐겁게 하며 일반 국민들은 그 피해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다시 토니 벤의 말을 들어 보자. “국민을 통제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첫째는 겁주는 거고 두번째는 기죽이는 겁니다. 지식, 건강에 자신감까지 갖춘 국민은 다루기 힘들죠.”
토니 벤의 주장처럼 우리 유권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기죽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 중앙선관위의 조사에서 ‘반드시 투표하겠다’는 의견이 화이트칼라는 63.9%인 반면 블루칼라는 49.6%에 불과했다. 기가 죽어서인지 변화가 절실한 계층이 선거에는 오히려 더 무관심한 것이다.
‘안정’이니 ‘견제’니 하는 정치권에 대해 서민들은 불만을 내뱉는다. “선거가 밥 먹여 줍니까? 국민은 먹고 살기 힘들어 하는데 그런 이야기 하는 사람 못 봤다.”
이런 불만에도 일리는 있지만 그렇다고 기권을 해버리면 불만스런 현실의 개선은 그만큼 더 멀어질 뿐이다. 물론 일반 유권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쉽게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의 뒷받침도 필요하다. 이번 선거부터 투표 인센티브제가 실시되지만 앞으로 이를 더 강화해나가야 한다. 그래도 효과가 없으면 무임승차심리에 따끔한 침을 놓기 위해 호주·스위스·벨기에 등이 실시하고 있는 벌금형 투표의무제를 도입해야 한다.
현실개선의 출발점은 투표다
국민이 원하는 정책 경쟁을 보장하기 위해 유럽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도 채택할 만하다. 독일처럼 초·중·고교에서 단계마다 정치교육·선거교육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우선 너도나도 투표에 나서 민의를 반영해야 한다. 투표는 서민들이 기득권자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다. 서민들이 자유인이 되는 건 오로지 짧은 선거운동 기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