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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쯤 읽어볼 글] 이명박 정부 어디로 가나
시사종교 > 상세보기 | 2008-03-20 23:48:08
추천수 8
조회수   2,634

제목

[한번쯤 읽어볼 글] 이명박 정부 어디로 가나

글쓴이

이명재 [가입일자 : 2002-07-08]
내용
이명박 정부 어디로 가나 <상>



노무현 정부는 실용정부였다



[프레시안 이근/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새 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이 되어가고 총선이 가까워지면서 이명박 정부에 대한 평가가 활발하다.



이에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대선 이후 3개월 남짓 보여준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이론적으로 검토하는 글을 보내왔다.



이근 교수는 세 편의 글을 통해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각종 정책과 행태를 비교·분석함으로써 현 정부가 표방하는 실용주의의 허상을 파헤쳤다.



이 교수는 노무현 정부가 과도한 실용노선으로 인해 지지기반의 이반을 가져와 몰락한 반면, 현 정부는 겉으로만 실용을 내세울 뿐, 실제로는 신자유주의에 경도되어 그 어떤 정부보다 강한 이념성을 띠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편집자>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공산주의?



민주주의의 반대는 무엇일까?

중고등학교, 심지어는 대학교 다닐 때까지 '국가 공인 정답'은 바로 공산주의였다.

한참 배워가던 시절, 그 어느 것에도 확신을 못하고 자신이 없었던 학생 시절에는 의아해 하면서도 왜 민주주의의 반대가 공산주의인지에 감히 따져보고 다른 생각을 가지려 하지 못했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권위주의 독재가 아닌가 의심하긴 했지만 다들 그렇게 말하니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넘어갔었다.

소위 비판의식, 의심을 갖는 사고에 대한 훈련이 없었던 탓이었다.

너무나 오랜 기간 '정답'의 학교교육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를 좀 더 하면서 '민주화'에 대한 다양한 이론을 접하게 됐는데, 당시 민주화 이론을 말하는 그 누구도 '공산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민주화를 논하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모두 권위주의, 혹은 관료권위주의, 군부독재에서 민주화로 가는 길을 연구하고 이론화하고 있었다.



좀 더 많은 시일이 지난 후 냉전이 종식되자 역시 서구의 학자들은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민주화라는 용어 대신 '체제전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로의 체제전환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처럼 공산주의(사회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개념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였던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알았던 정답은 오답인 것이었다.



너무 뻔한 진실이지만, 용어의 사용과 그에 대한 '정답화'는 매우 정치적인 의도를 그 뒤에 감추고 있다.

예를 들어 냉전기간 동안 언론과 주류 담론에서는 '공산세력'과 '민주세력' 간의 대치를 얘기했고, 공산세력이 아닌 자본주의 국가는 그 국가가 실제 민주주의 국가건 권위주의 독재 국가건 자연히 모두 민주세력으로 분류되는 마술을 우리는 보았다. 군사독재의 시절 대한민국은 그리하여 민주세력으로 분류되곤 하였다.



필자는 한동안 수많은 서구의 민주국가에서, 그리고 일본에서도 공산당이라는 정당이 존재하고, 때로는 사회주의 성향을 띤 정당이 집권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곤 했다.

'정답'을 말하는 세뇌교육 때문이다.



우리는 학교를 다니는 동안 '따지는' 교육을 안 받고 정답을 알려주는 교육을 받아왔다.

제도권의 정규 교육뿐만이 아니라 소위 '운동권'의 '학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답을 모르거나 쉽게 이해하지 못하면 왕따를 당하는 야릇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결국 잘 몰라도, 이해가 안 되도 마냥 외우는 길을 택하는 편리함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기가 가진 생각 속에서 엄밀성과 창조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따지는 토론식 수업은 불편하고 정답이 전달되는 학원식 수업이 편안하다.



민주 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한국의 정치 및 경제 담론에서 강요된 부정확한 정답들은 무수히 많았다.

주로 정답 교육에 익숙한 소위 보수 언론과 학계에서 생산한 담론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의 조선과 21세기의 한국을 비교하는 것, 한국의 햇볕정책과 1930년대 영국의 채임벌린이 폈던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을 비교하는 것, '전쟁을 준비해야 전쟁을 막는다'라는 매우 단순한 주장, 노무현 정부가 '좌파정부'였다는 주장, 한미FTA를 하면 개방이고 그렇지 않으면 쇄국이라는 주장, 지난 10년이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주장, 시대정신이 성장이라는 주장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정치적으로, 그리고 감성적으로는 쉽게 와 닿을지 모르지만 따져 보면 결코 제대로 된 정답이 아니다.

비교의 방법을 모르거나, 비교와 비유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비유와 이론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특정 조건 하에 형성된 주장과 이론을 조건을 무시하고 사용하거나, 개념이 탄생한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용했기 때문에 그런 오류들이 나왔다. 사회과학적 시각에서 볼 때 방법론상 대부분 F학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주장들이 언론을 통해 정답처럼 국민의 여론을 형성하고 세뇌하며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왔다.



노무현 실용주의 정부



그러한 배경을 뒤로하고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였다.

이명박 정부는 소위 '좌파 이념정부'인 노무현 정부와 대척점에 서서 '실용'를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언론에 의해 정답화되어 있다.

실용정부라는 말 뒤에는 쓸데없이 이념논쟁으로 국력을 소모하지 않고 국민을 위해 행동으로 결과를 보여준다는 정치적 메시지가 숨어 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이러한 정답화는 현 정부에 매우 긍정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한번 따져 보아야 한다. 과연 노무현 정부는 이념정부였던가?



실용주의(pragmatism)라 하면 그 철학적 개념의 연원과 정의가 간단한 것이 아니므로 이 글에서는 현재 한국적 맥락을 고려해 한국의 일반인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실용주의에서부터 이야기를 하겠다.



실용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이 주장한 이른바 '흑묘백묘론'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주장이다. 즉 원하는 목표와 결과가 있고, 그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이념에 상관없이 가장 적절한 수단을 사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용주의가 진정한 실용주의이기 위해서는 수단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이 존재해서는 안 되며 경험적으로 증명된 수단의 효용만을 따져야 한다. 그래야만 원하는 목표를 위하여 이념을 뛰어 넘는 다양한 수단을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경제성장이라는 목표를 위해 어떤 경우에는 정부의 시장개입을 최소한으로 하는 자유방임적인 경제정책을 쓸 수 있고, 상황이 바뀌면 전략무역, 재정지출 확대를 통한 총수요 창출 등 정부의 시장개입이 채택될 수도 있어야 실용정부이다.



실업을 줄이기 위해 북유럽과 같은 복지주의, 조합주의 모델을 원용할 수도 있고, 상황이 바뀌면 영미와 같은 신자유주의 모델을 가져올 수도 있다. 좌든 우든, 흑묘든 백묘든 효용이 검증되었고 필요하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하다면 미국과 같은 길을 갈 수도 있고, 때로는 미국과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어야 실용적이다. (단순히 힘센 쪽에 붙어서 힘센 쪽이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것이 실용적이라면 가장 실용적인 한국 정부는 미국의 52번째 주 정도로 편입하는 정책을 쓰는 정부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정부를 실용정부라고 하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는 상대적으로 분배를 강조하고, 과거 기득권 세력을 역사 바로세우기 이념으로 공격하고 또 북한에 대하여 퍼주기를 한 것 등으로 인식되어 (좌파)이념정부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노무현 정부는 이념정부이기보다는 오히려 실용정부라고 불리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



노무현 정부가 다분히 개혁 지향적이고, 과거보다는 좀 더 사회복지와 분배를 강조하며, 또 주류세력을 새로운 세력으로 교체하려고 한 점에서는 개혁세력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정책의 내용을 보면 좌파이기보다는 우파의 내용이 매우 많이 들어간 우파 실용정부에 가깝다.



노무현 정부는 취임 초부터 국민소득 2만불 달성이라는 성장지향적인 국가목표를 세웠고, 신자유주의에 가까운 법인세 인하, 특소세 인하, 재벌규제 완화 등을 허용했다. 임기 말에는 신자유주의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였다.

스스로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한 것을 보면 노무현 정부 자신이 스스로를 흑묘든 백묘든 가리지 않는 실용정부로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경제문제뿐만이 아니라 북핵 문제에 있어서도 진보적인 이념에 매달리기보다는 실용적인 대응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해법이 미국과 다를 때에는 미국과 각을 세웠지만, 전시작전통제권 이양, 미군기지 재편,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등에서는 미국의 요청을 거의 완벽하게 들어 주었다.

해외파병도 지지기반의 이반을 감수하면서 미국의 요청을 들어준 셈이다.

반면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나 미사일 방어(MD)의 문제는 끝까지 거부하는 고집도 보여주었는데, 이는 친미냐 반미냐의 이념을 넘어서 실용적으로 대미관계를 풀어나간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물론 잘잘못에 대한 판단은 다른 문제다)



국내정치도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시도하기도 하고, 내각에 삼성 인맥의 장관과 신자유주의 철학의 재경부 관료를 앉히기도 하였다.

출발은 호남에 기반을 둔 정권이었지만 핵심 요직의 상당수가 부산 경남의 인사로 채워진 것도 어찌 보면 매우 실용주의적인 선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즉 목표를 위해 이념과 고정관념을 뛰어 넘어 유연하게 수단을 활용한 것이라고 본다면 노무현 정부는 실용주의 정부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노무현 정부가 너무 실용주의적이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지지기반을 상실하고, 결국 진보와 보수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실용적인 활용은 지지기반인 서민에 대해 참담한 경제적 부담을 안겨주며 정권을 마치게 했다.

정권 말 노무현 정부의 낮은 지지율은 여론을 주도하는 보수 언론의 힘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지나친 실용성을 반영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실용주의 정부가 주류 언론과 보수학계에서 좌파이념정부로 규정되는 것은 아마도 한국만의 기현상이 아닌가 싶다.

아마도 공산당이 존재하고 사회당이 집권하는 유럽, 사회복지의 수준과 국민의 조세부담율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북유럽적인 정부가 한국에 있었다면 이들 정부는 좌파이념정부가 아니라 아마도 원색적인 빨갱이 정부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이들 유럽의 국가들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를 공유하는 선진국들임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미국만 보지 말고 유럽도 공부해야 할 때다.



이근/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anotherway@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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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어디로 가나 <중>



이명박 정부는 '신자유주의 이념정부'



[프레시안 이근/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이명박 정부야말로 진짜 이념정부가 아닌가?



노무현 정부는 보수언론과 학계의 '정답'과 달리 이념정부보다 오히려 실용정부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이제 '실용정부'를 표방하는 이명박 정부가 과연 실용적인지 그 '정답'을 검증할 차례다.



한국적인 맥락으로 볼 때 이념정부란 특정 이념에 갇혀서 정책목표, 정책수단, 정책구호 등이 경직적으로 그 특정한 이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 정부의 요직도 같은 이념을 공유하는, 즉 코드가 맞는 사람들로만 채워진 정부를 의미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념은 사회주의 이념과 같은 좌파 이념뿐만이 아니라 우파 이념을 포함한 다양한 세계관 즉, 사회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모든 체계적 사고의 집합을 지칭한다. (한국에서는 좌파 이념만 이념이라고 생각하는 공부가 제대로 안 된 사람도 많이 있는 듯하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이념을 굳세게 따랐던 영국의 대처 정부, 미국의 레이건 정부, 현 조지 W. 부시 정부 등도 이념정부다.

그리고 나치즘을 신봉했던 독일 나치정부도 이념정부라고 할 수 있다.



출범한 지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이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를 완전하게 검증하고 판단할 수 있는 적절한 시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나온 발언과 정책방향, 정부 출범 후 나온 인사, 그리고 이 대통령의 발언과 행보를 종합해 볼 때, 이명박 정부는 현재로서는 노무현 정부보다 훨씬 더 이념성을 많이 띤 이념정부에 가깝고 그 이념은 신자유주의와 개발주의가 복합된 '변종 신자유주의'라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인 요소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 때부터 작은 정부, 민영화, 규제완화, 시장원리에 의한 경쟁, 감세, 노동시장의 유연성, 사회복지의 축소 내지 시장화 등을 강조해 왔다. 잘 알다시피 이러한 내용은 대처, 레이건, 현 부시 정부가 고수한 신자유주의의 금칙과 같은 것이다.



아주 단순히 요약하자면 신자유주의는 다음과 같은 경제운용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다.

(1) 정부에 의한 시장 개입은 시장실패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최소화해 시장이 자유롭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한다.

(2) 이러한 시장에서는 기업이 세금과 규제, 그리고 경직된 노동시장의 부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경쟁하고 수익률도 올라간다.

(3) 기업이 잘 되면 궁극적으로 국가 경제가 성장하고, 그래서 실업도 감소하고, 세수도 늘어난다.

(레이건 대통령 당시에는 이를 공급중시경제학(Supply-side Economics)이라고도 불렀다)



정책적으로 이명박 정부는 정부기구의 축소, 법인세·종부세·양도세 감세, 재벌기업에 대한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금융산업 구조개선을 위한 법률(금산법)' 완화, 수도권 규제 완화, 공기업 민영화, 사회복지의 축소, 건강보험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 이념에 너무나도 충실한 경제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교육정책도 신자유주의의 원칙 아래 시장과 경쟁에 충실하게 나아가고 있다. 노동정책도 정규직의 확대보다는 시장의 원리에 따라 자유롭고 유연하게 노동의 수급이 이루어지는 것을 최선의 가치로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는 정책방향에서 볼 때 신자유주의 이념에 매우 충실한 이념정부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인사를 보더라도 경제뿐만 아니라 교육, 노동, 복지, 환경, 문화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이념을 공유하거나 저항 없이 따르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각 부처의 장관들은 그 부문의 전문성보다는 신자유주의적인 이념을 공유하면서 신자유주의의 혜택을 주로 보았거나, 앞으로 볼 상류층 사람들로 대부분 채워져 있다.

상당수는 개인적으로 시장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것을 시장에 잘 적응하는 경쟁력 혹은 능력으로 인식하고, 그러지 못한 사람은 시장에 적응하지 못하는 바보로 치부하는 경향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정책방향과 인사는 왜 문제일까? 이를 아주 단순하게 이해하기 위해 신자유주의의 경제 메커니즘에 대한 한 가지 예를 들어본다.



대기업의 임원진은 보통 평사원과 달리 억대의 어마어마한 연봉을 받아간다.

평사원과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비교할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다.

이에 대해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설명한다. '회사의 이익창출에 기여하는 만큼 연봉을 받아가는 것이 시장논리다.

임원진이 기여하는 부분이 일반 평사원보다 훨씬 높아 연봉이 그만큼 차이 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기여도와 연봉을 어떻게 기계적으로 계산하는지에 논란이 있겠지만 일단 여기까지 인정하기로 하자.

그렇다면 회사가 경영난에 허덕이고, 적자를 보는 상황에 돌입하면 어떠한 일이 발생할까? 이 경우 불행하게도 신자유주의는 임원진을 고용조정하기보다는 일반 평사원 아니면 비정규직을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고용조정 할 것을 권고한다.



물론 임원진도 감봉을 당하겠지만 그 고통은 평사원이나 비정규직이 직장을 잃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일부 임원진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지만 대개의 경우 이들은 새로운 회사에 다시 임원진으로 채용되거나 그 동안 벌어놓은 막대한 자산(부동산, 예금, 주식, 펀드 등)으로 평사원이나 비정규직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이렇게 신자유주의는 경제가 잘 나갈 때 상위층이 엄청나게 버는 것을 당연시하는 한편, 경제가 안 나갈 때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하위층이 책임을 지게 한다.



거기다 사회보장을 최소화하거나 민영화를 하게 되면 자산소득이 많은 상위층은 노동시장에서 잠시 물러나 있어도 질 좋은 사회보장과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노동시장에서 벗어난 중·하위층은 그런 혜택에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물론 경기가 좋아지면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실업자의 재취업이 가능하게 되지만, 국가경제의 구조가 상위층의 소비력에 의존하는 것으로 되어 버리면 경기회복이 전반적인 고용확대로 이어지기 어렵다.

게다가 지식 서비스, 하이테크 산업이 경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되면 상위층의 고급인력 이외에는 취업의 기회가 많이 늘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이러한 신자유주의 이념에 충실해 신자유주의 정책을 급속도로 도입하게 되면 정부가 1997년 금융위기 이후 개혁을 위해 시장의 강자(재벌)들을 묶어 놓았던 규제를 거의 다 풀어줄 수 있다.

재벌기업들을 규제한 이유는 무분별한 확장과 건전치 못한 지배구조를 가지고 금융위기에 기여했기 때문인데도 말이다.



규제를 갑자기 풀면 시장이 매우 불균형·불균등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법인세 감세, 출총제 폐지, 금산법 완화, 사회복지 시장화, 노동시장 유연성 강화는 한국의 경제구조를 재벌기업과, 이미 상당한 자산을 가진 자에게 특혜를 주는 구조로 급속히 바꿀 것이다.



금융시장의 장기적 안정도 담보하기 어렵다.

신자유주의 선진국인 미국의 서브 프라임사태 및 계속 되는 금융 불안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근본주의적인 신자유주의에서는 시장이 방향감각을 쉽게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신자유주의는 상위층이 확대한 부를 사회전반으로 흘려보내는 적하효과 (trickle-down effect)를 이념적·이론적으로 강조하고 있으나 실제로 상위층은 경제가 잘 나갈 때 훨씬 많이 취하고, 경제가 안 나갈 때 중하위 층을 희생양으로 삼기 때문에 적하효과는 매우 제한적이다.

반대로 미국, 일본, 영국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한 정부 하에서 격차가 확대된 것이 증명되고 있고 적하효과는 검증되지 않고 있다.



박정희식 개발주의의 결합



이러한 신자유주의에 소위 '개발주의'가 접합되면 정부는 시장의 강자를 위해 매우 강력한 협력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즉 위에서 기술한 대기업과 상위층에 대한 특혜에 장애가 되는 것을 정부는 강력한 힘으로 제거해 나가는 역할을 하게 된다.

민영화에 대한 저항세력, 사회복지 축소에 대한 반발세력, 비정규직의 농성, 노동자의 파업 등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세력은 강력한 국가의 힘으로 제거되고, 그 과정은 박정희식 개발독재의 형태를 띠게 된다.



아직 이명박 정부가 박정희식 개발주의의 모습을 전면적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지만 코스콤 비정규직 농성에 대한 물리력의 동원, 대운하 발상, 노조에 대한 인식, 법치에 대한 인식, 소위 '좌파세력 척결'과 같은 구호 등을 보건대 개발주의적 사고는 이명박 정부에서 이미 넘쳐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정희식 개발주의는 핵심적으로 투입(input)을 늘려서 산출(output)을 증가시키는 매우 초보적인 경제발전 모형이다.

투입을 늘리기 위해 국가는 강제적으로 투입을 동원(mobilization)하는 역할을 한다.

과거 개발 독재 시절에는 안정적인 투입을 위해 국가가 노동을 통제하고, 재벌기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며, 국민의 '정신력'을 고양해 노동시간을 늘렸다.



그때는 그것이 가능했다. 높은 경제성장(output)을 이루어 냈다.

그러나 경제가 성숙해 지면 경제성장에는 투입보다 생산성의 향상이 훨씬 중요해 진다.

정보, 지식, 하이테크, 서비스 산업을 지향하는 지금의 한국 경제는 정신력으로 무장해 새마을 운동을 하거나 노동을 통제해 노동 강도만을 높일 단계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명박 정부의 패러다임은 운동장에서 구보하고, 새벽에 출근하고 한밤에 퇴근하며, 월화수목금금금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투입 위주의 개발주의 정신에 갇혀있다.

게다가 '비즈니스-프렌들리'라는 구호와 기업과의 핫라인 설치 등은 과거 재벌기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개발주의의 관성에 지나니 않는다.



사실 정부가 신자유주의의 원칙을 철저히 따른다면 정부가 비즈니스 프렌들리하기보다는 규제는 완화하되 쓰러지는 기업은 쓰러지도록 하고 시장에서 살아남는 기업은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 대통령이 기업과 핫라인을 설치하고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치면 기업들에게 오히려 개발주의적인 잘못된 시그널을 보내게 된다.



Deja Vu: 정실 자본주의?



이렇게 신자유주의와 개발주의라는 이념이 합쳐지면 시장에서 강자 중심의 지배 심화, 재벌기업과 정부와의 정경유착, 재벌기업에 대한 건전한 규제와 감시의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이러한 그림은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이다.

바로 97년 IMF경제위기 직전의 한국 정치경제다.

그때는 이것을 정실자본주의(crony capitalism)으로 불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교롭게도 지금 이명박 정부의 경제 요직은 금융위기 당시의 사람들로 다시 채워져 있다.



강자 중심의 정치경제구도 재편과 함께 소수의 약자들에게 주어지는 안전장치가 순식간에 사라지면, 그리고 정부는 약자들이 스스로 살아남지 못하면 자연 도태되어야 한다고 방관한다면 앞으로 5년간의 이명박 정부는 참으로 피곤하고 힘든 나날이 될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진정으로 실용정부를 추구한다면 변종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의 덫에서 빨리 빠져나와 흑묘백묘의 정신으로 양극화 해소와 건전한 자본주의의 장기적 발전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편견 없이 연구·채택하고 그에 맞는 인사를 실용적으로 찾아내야 한다.



이근/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anotherway@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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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어디로 가나 <하>



노무현 정부에서 배워야 할 것



[프레시안 이근/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이명박 정부가 밟고 있는 지뢰 : 정보화 사회의 투명성



노무현 정부가 너무나도 실용적이어서 지지기반을 상실하고, 신자유주의의 실용성을 너무 믿은 나머지 상위층에게만 주로 혜택이 돌아가는 경제 성적표를 남겼지만, 긍정적인 업적을 만들어 놓은 것도 많이 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민주주의의 실천과 사회의 투명성 제고라는 면이다.

이는 최근 이명박 정부와 비교가 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새로운 인기가 형성되는 듯하다.



민주주의의 실천이라 함은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방법으로 민주주의의 제도와 절차를 깨고 정치판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는 점, 스스로를 견제하는 권력기구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인내했다는 점, 그리고 비판세력에 대해 힘보다는 논쟁으로 따지려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무현 정부의 이러한 민주주의의 실천은 스스로에 대한 가감 없는(때로는 과장된) 보도를 용인하고 한국의 실정에서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높은 선진국의 검증기준과 판단 기준을 허용해 사회적 투명성과 '선진성'을 동시에 높였다.



이미 국민이 한 번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투명성의 매력을 맛보게 되면 다음 정부가 이전의 기준으로 돌리는 것은 엄청나게 어렵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정권은 이미 높아진 기준과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는 칼날이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칼날은 이미 이명박 정부의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여실히 빛을 발했다.

솔직히 노무현 정부가 인내했던,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 만든 매우 선진적인 기준을 잣대로 한다면 그 기준을 통과할 이명박 정부의 인사는 극소수였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실천과 투명성의 제고는 노무현 정부가 심어 둔 과거회귀세력에 대한 지뢰라고 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의 인수위와 초기 내각 인사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 지뢰를 밟고 있다.

사적인(private) 성공(결과적인 성공)과 공적인(public) 능력을 혼동하는 많은 사람들이 국가를 사적 능력의 영역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진출하려 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과거 사적인·개인적인 성공, 특히 과거 개발주의·권위주의와 동반성장한 개인적인 성공은 정상적인 과정을 벗어난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국민이 공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기 매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의 많은 사람들은 현재 주류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갖고 있거나 재산을 많이 불렸으면 이미 공사(公私)의 영역을 불문하고 능력이 검증된 것이라고 믿는 단순한 오만함과 좁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단순한 오만함과 세계관이 노무현 정부 시기 올려놓은 투명성의 지뢰에 다 걸린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지뢰를 밟은 전우를 끌고 갈 것인가 버리고 갈 것인가로 고민하고 있지만 민주주의 사회 곳곳에 심어져 있는 지뢰 그 자체를 제거하지는 못 한다.

제거 시도 자체가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고, 더 깊은 지뢰의 수렁으로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보수언론이 보도하지 않고, 아무리 엠바고를 걸어도 말릴 수 없는 것이 민주주의와 정보화의 세계이다.



더구나 일반인들의 속성은 감추려고 하는 것을 캐는 것에 흥미를 갖게 되지, 잘한다고 선전하는 것에는 금방 식상하게 마련이다.

보수언론의 숨기고 포장하고, 정당화하고, 노무현 정부를 반복적으로 난도질하는 기사들에 대해 독자들은 금방 매력을 잃거나 식상하게 되고, 새롭게 터뜨리고, 파헤치고, 비판하는 언론으로 눈길을 돌리게 된다.

그렇다고 이러한 언론을 통제하자니 노무현 정권이 심어 놓은 투명성이라는 지뢰 때문에 여의치 않다.



필자는 권력의 트릴레마(trilemma)라는 가설을 주장하고 있다.

(1) 권력의 유지

(2) 권력 사용의 자유방임

(3) 권력 사용의 투명성 중 한꺼번에 세 가지를 다 갖는 것은 불가능하고 많아야 두 가지만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지금 한나라당과 같이 새롭게 권력을 잡아 유지하고, 그 권력을 쓰고 싶은 대로 사용하려면 한나라당은 언론 통제, 정보화의 축소 등으로 권력 사용의 투명성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권력을 무분별하게 자유방임적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몰라야 하고 국민들은 정부가 잘하고 있다고만 생각하도록 언론 통제를 해야 한다.



반면 권력 사용의 투명성을 지키면서 권력을 유지하려면 권력을 자유롭고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적인 절차와 기준을 따라 스스로를 제어하고 인내해야 한다.

이 경우 민주화와 정보화를 동시에 지키면서 권력을 유지하는 선진적 정치가 이루어진다.



반면 투명성을 유지하고 권력을 마음대로 사용하게 되면 그 권력은 급강하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를 그림으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이 삼각형에서 동시에 가질 수 있는 변의 수는 두개를 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이 권력의 트릴레마에서 한국은 이미 민주화, 정보화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정부가 권력 사용의 투명성을 줄이면서 나머지 두 가지를 가지려는 권위주의적인 노력은 실패하게 되어 있다.



즉 이명박 정부는 과거의 패러다임과 민주주의 이전의 관행으로는 지지율 하락의 국면을 돌파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보화와 민주화가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투명성을 없애면서 자유방임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려 하면 권력을 급속도로 잃게 되어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정보화 사회에 빨리 적응해 그간 높아진 기준과 투명성에 부합하는 인물과 정책을 찾아내는 것이 이명박 정부의 과제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5년 내내 정말로 피곤한 하루하루가 될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는 언쟁을 많이 해서 피곤했지만, 행동으로 실천하겠다는 이명박 정부에서는 저항의 행동을 유발해 피곤함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느끼게 될 것 같다.



정보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대통령의 상징 전략



이명박 대통령은 서민과 같이 하고, 서민을 걱정하고, 물가를 걱정하는 모습으로 비추기 위해 시장에 자주 들르는 모양이다.

국밥도 먹고, 재래시장에서 물건도 사곤 한다. 라면값도 물어보고, 쌀값도 알아본다.



너무나도 훈훈한 광경이라고 생각되겠지만 이에 대한 많은 국민의 반응이 꼭 좋지만은 않다.

국민들은 그런 모습과 실제 정책의 괴리를 금방 알기 때문이다. 정보화 사회가 국민들에게 가져다 준 힘이다.

인터넷 검색을 조금만 하면 실제 정책의 내용, 책임소재의 확인 등이 매우 쉽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검색까지 안 해도 강부자, 고소영 인사를 보면서 괴리를 안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많은 정보가 통제되고, 그 속에서 대통령의 발언과 행보가 포장되었지만 정보화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속속들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부동산 투기, 표절, 위장전입, 병역면제 등등의 기록뿐만이 아니라 정책의 내용,

과거의 발언, 과거 법안 발의의 기록 등이 가감 없이 인터넷과 입을 통해 전달되게 된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유언비어가 오히려 정확한 보도였다.

이제는 보수 주류언론이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주류언론보다는 비주류 언론과 인터넷 매체에 더 정확한 정보가 돌아다니고 있으며 공신력도 점차 올라가고 있다. 군사독재 시절 유언비어의 공신력이 올라가면서 권위주의 정부가 무너졌듯 지금 비주류 매체의 공신력이 올라가면서 소위 보수 주류세력은 위기의 임계점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제의 정책과 사고방식이 겉으로 보여주는 언행과 다르면 그 언행은 금방 정치적 '쇼'로 치부되게 된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실제의 말·행동·정책이 투명하게 파헤쳐지고 있고, 날카로운 분석을 곁들이는 서비스까지 제공된다.

그에 따라 과거 박정희, 전두환식의 상징전략(쇼)은 오히려 역작용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이명박 정부는 인사와 정책, 그리고 쇼에 있어서까지 너무나도 과거의 패러다임에 갇혀있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은 새로 도입된 것 같지만 낡은 포도주 병에 새 술을 붓는, 연도수(vintage)와 포도주의 내용이 맞지 않는 불량품(개발주의가 결합된 변종 신자유주의)이어서 그 포도주가 제대로 팔릴지 회의적이다.



지도자의 도덕성 왜 중요한가?



국제정치학에 소프트 파워라는 개념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알아서 나를 따르도록 하는 힘'을 일컫는다.

국내정치 영역에서도 지도자의 소프트 파워라는 것이 필요하다. 국민들을 강제하지 않고 국민들이 존경해서 지도자를 자발적으로 따라오게 할 때 정치가 태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민주주의 시대에 실용정부가 진정으로 실용정부이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국민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지도자의 소프트 파워, 리더십의 소프트 파워가 매우 중요해지는 것이다.



대통령이나 장관과 같은 지도자의 소프트 파워는 우선 국민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덕목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그래서 지도자의 도덕성, 인품, 모범이라는 것 등이 중요하다.

지도자가 도덕적이지 않고, 솔선수범하지 않고, 한 입으로 두말 하고, 말과 정책이 달라지면 국민들은 지도자를 알아서 따르기보다는 무시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정부는 소프트 파워가 아니라 강제력이라는 하드 파워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국가 지도자의 도덕성은 능력의 후순위가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수단이다.

회사와 같은 사적 영역에서는 도덕성 보다 이익을 낼 수 있는 능력이 우선되겠지만 민주주의 국가라는 공적 영역에서는 국민이 자발적으로 따라올 수 있는 지도자의 정당성, 도덕성, 솔선수범 등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정말 실용정부로서 정책 집행의 거래비용(transaction cost)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이러한 소프트 파워와 능력을 겸비한 지도급 인사를 주요 부문에 영입하고, 많은 국민의 자발적 동의를 구해 나가야 한다.

권위주의 시절의 밀어붙이는 방식으로는 이제 '실용적'으로 정책집행의 거래비용을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글을 마치며



물론 도덕성과 정당성, 인품과 같은 소프트 파워는 지도자가 자신의 비전을 펼치기 위해 가지는 매개일 뿐, 지도자의 모든 것이 될 수는 없다. 국회의원이나 다른 공직의 이상적인 지도자는 이러한 수단 못지않게 국정을 이끌어갈 비전과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국회의원 공천 및 선거와 관련해 야당이건 여당이건 모두 이러한 소프트 파워(도덕적 깨끗함 등)라는 수단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 같다. 즉 공천의 기준이 도덕성 이상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현 단계의 한국정치에서는 이것만 해도 훌륭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문제는 그것만으로 여당과 야당의 정책적 차이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떠한 국정철학과 비전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여야 모두 깨끗한 사람들을 뽑았다고 가정해도 이들이 모두 신자유주의자이고 개발주의자라면 한국이라는 국가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한국이 선진국의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물리적으로 여야간 힘의 균형을 맞추거나 아니면 여당에 안정 의석을 부여하는 수준의 선거도 중요하지만 국가의 미래비전과 정책을 놓고 따지는 선거를 하는 게 절실하다.



이제는 도덕성과 인품 못지않게 당과 정치인, 지식인의 투명한 정체성과 철학, 분석력이 중요해지는 시기이다.



이근/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anotherway@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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