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아버지의 공 뿐만 아니라 과 역시 짊어져야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에게 고함
1975년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8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일명 ‘인혁당 사건’이 결국 32년 만에 무죄로 결론이 났다. ‘사법살인’이었음이 입증된 것이다. 그와 동시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정권에도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을 정면으로 유린한 긴급조치는 사실상 부당한 것이었음을 서울중앙지법이 인정한 셈이다. 당사자인 박 전 대통령이 없는 지금 세간의 관심은 그의 딸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쏠리고 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박 전 대표가 아버지를 대신해 당장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한다는 강경한 목소리도 들린다.
그런데 박 전 대표 측의 반응은 자못 놀랍다. 일단 박 전 대표 본인이 ‘단지 법원이 결정한 것 아니냐’며 애써 그 의미를 축소하는가 하면, 한 측근은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딸에게 책임을 물리냐’며 연좌제를 운운하고 나섰다. 아무리 봐도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다. 물론 박 전 대표가 단지 박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버지의 죄를 대신 짊어져야한다면 그것은 분명 현대판 연좌제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이번 판결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녀를 향한 사과 요구가 결코 연좌제 망령의 부활이 아니라는 점을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해두고 싶다. 현재 축적된 정치인 박근혜의 정치적 자산이 상당부분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에 기대어 쌓아올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해 국민이 갖고 있는 애증의 이중적 속내에 감춰진 향수를 그동안 적절히 자극해오며 정치적 입지를 다져왔다. 오랫동안 고수해온 머리 스타일 역시 모친인 육영수 여사를 쏙 빼닮은 것이었다. 즉, 단연코 지금의 ‘정치인 박근혜’는 ‘대통령 박정희’의 그늘을 벗어나서는 성립할 수가 없는 존재다.
한발 양보해서 아버지의 정치적 유산을 이어받는 일 자체는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치자. 아니, 오히려 보는 시각에 따라 긍정적일 수도 있다고 해보자. 그러나 문제는 아버지의 긍정적 유산은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반면 부정적 유산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고 회피하려는 자세에 있다. 사건의 조작 가능성을 언급하고, 법원의 결정일 뿐이라며 애써 덮어두려고 하는 박 전 대표의 행보에는 실망스러움을 넘어 뻔뻔함마저 배어나온다. 이러한 발언들은 보수 지지층의 이탈을 막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희생자 유가족과 불의에 공분(共忿)하는 국민들을 우롱하고 기만하는 처사다. 차기 국가 지도자를 꿈꾸는 인물이라면 결코 이래서는 안 된다.
몇 년 전 얼굴 한번 못 본 장인의 전력을 들추며 노무현 후보를 물고 늘어졌던 이들이 이제는 친아버지의 정치적 유산을 물려받은 정치인 딸에게 연좌제가 웬 말이냐고 반발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쓰디쓴 입맛을 감출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모순은 제쳐두고라도 한국의 대처를 자처하며 누구보다 국가를 위해 헌신할 것을 강조하는 박 전 대표의 진정성이 국민에게 진심으로 전해지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공(功)뿐만 아니라 과(過) 역시 겸허히 인정할 수 있는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래야 국민은 그녀에게서 지도자로서의 희망을 엿볼 수 있다. 들은 얘기로 독일의 한 나치 전범의 딸은 희생자들의 유가족을 자진해서 찾아다니며 아버지의 잘못을 대신 사죄하곤 했다고 한다. 그것이 오히려 아버지의 명예를 바르게 보존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정치인 박근혜에게 이 같은 행동을 기대해보는 건 무리일까.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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