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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도의 기사를 통해서 본 조선일보의 정체성
최 영 태*
중심어: 조선일보, 민주화 운동, 광주항쟁, 군부세력, 정체성
Ⅰ. 머리말
1980년에 한국 민주주의는 중대한 갈림길에 처해 있었다. 유신체제의 연장과 함께 제2의 군부독재시대를 맞이할 것이냐, 아니면 그것을 청산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복원시킬 것이냐를 결정해야 할 시점이었다. 자연히 군부독재시대를 연장하려는 극우세력과 민주주의를 복원시키려는 민주화 세력 사이에 첨예한 대결국면이 조성되었다. 극우세력의 중심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었고, 민주화 세력의 중심은 대학생, 재야인사, 야당 등이었다.
이 대결국면에서 신군부세력은 5‧17계엄확대라는 비상조치를 통해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제압하였다. 신군부 세력의 이러한 반민주적 조치에 맞서 광주시민들이 5월 18일부터 10여 일 동안 대대적인 저항을 펼쳤지만 역부족이었다. 수천 명의 사상자(死傷者)를 낸 끝에 광주도 마침내 신군부 세력에 장악되었고, 이와 함께 1980년의 민주화 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때부터 민주화 세력이 승리를 거둔 1987년 6월항쟁 때까지 약 7년 동안 한국 민주주의는 유례없는 암흑시대를 경험해야 했다.
1980년의 민주화운동이 실패하고 군부가 재집권한 원인과 배경으로는 무엇보다도 신군부 세력의 힘이 민주화세력들에 비해 우세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과 유신체제의 붕괴가 민주화 운동으로부터 일정 부분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은 사실이었지만 군부세력은 상층부의 얼굴만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교체했을 뿐 권력기반 그 자체는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반면에 민주화의 중심세력인 학생, 지식인, 노동자들은 대규모 시위와 산발적인 파업 이외에 권력을 쟁취하거나 유신의 근본 구조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이룩할 충분한 이념적․조직적․물질적 수단을 갖추지 못하였다. 야당 세력이 구심점을 갖지 못한 채 분열상태에 처해 있었던 것이나, 중간계급이 민주화 세력에로의 적극적인 합류를 주저한 것도 민주화 운동 실패의 중요한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김영명 1999, 236 ; 242-243).
그러나 1980년의 싸움에서 신군부 세력이 승리한 데에는 언론의 부정적 역할도 주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현대인들에게 언론매체는 세상을 인식하고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창구이다(한국언론학회 편 1999, 28). 그런데 본의였던 아니었던 간에, 당시의 언론은 탄압자의 편에서 광주항쟁을 바라보고 공식화하였으며, 진실을 은폐하고 사실을 왜곡했다(송정민 1997, 113). 특히, 일부 언론은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5월 민주화 운동과 광주민중항쟁을 폄하하고 민주화 세력과 광주를 고립화시키는데 앞장섰다. 그들은 또한 인명을 살상하고 국가헌정을 무너뜨린 소수 군인들의 범법 행위를 지지하고 정당화하는 데 앞장섰다.
민주화 세력과 많은 시민단체들 그리고 일부 연구자들은 이런 반민주적이고 부도덕한 언론의 대표적인 대상으로 조선일보를 지목한다. 당시 조선일보가 80년 민주화의 봄을 혼란기로 규정하여 국민여론을 호도하고, 광주민중항쟁을 왜곡 보도하여 광주를 고립시키는 데 일조했으며, 또 민주화 운동을 무산시킨 전두환을 “국민의 영도자로 극구 찬양”하는 등 정상적인 언론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행위를 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특히 그들은 조선일보의 이런 행위가 단순한 언론 통제 때문이 아닌,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조선일보가 이렇게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언론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고 반민주적 행위를 저지른 것은 조선일보의 역사관과 정체성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 측은 이런 주장에 전혀 동의하지 않고 있다. 1980년 한 해를 정리할 시점인 1981년 3월 5일 창간 61주년을 기념하는 사설에서 조선일보는 “본보가 내세우고 있는 불편부당의 사시(社是)는, 언제나 치우치지 않는 신문제작의 올바른 정신을 표방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치우치지 않는 올바른 국민의사를 신문제작에 반영시켜왔고 반영시키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2000년에 간행된 조선일보 80년사에서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은 일제하에서의 친일행위와 해방 후의 반민주적 행위를 부정하면서, “조선일보는 자유당과 군사정권의 독재 때는 민주 투쟁을 벌였습니다. 일제 때나 지금이나 온갖 어려움 속에서 조선일보가 일관되게 견지해 온 것은 ‘할 말은 하는 신문’의 정신입니다”라고 주장하였다. 1980년대 당시는 물론이요 2000년도까지도 조선일보는 조선일보의 과거사 문제에 대하여 민주․민족․진보진영과 전혀 다른 평가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우리나라의 주요 신문이고 또 과거행적과 관련하여 끊임없는 논쟁거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1980년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언론의 관계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 글에서는 조선일보가 암울한 시대에 언론기관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라도 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오히려 신군부 세력에 대한 적극적 동조를 통해 극우 독재세력의 대변지 노릇을 하고 파시즘 체제의 공고화에 기여했는지를 살필 것이다. 또 만일 1980년 조선일보의 모습이 시민단체들의 주장쪽에 가깝다면 그 원인은 신군부 세력의 언론통제 정책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는지, 혹은 조선일보의 잘못된 역사관과 반민주주의적 가치관 때문이었는지를 살필 것이다. 이런 성격의 조사는 1980년 신군부 세력의 재집권의 원인과 배경을 이해하는데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를 둘러싼 사회 일각의 논쟁을 이해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Ⅱ. 1980년 5월 민주화 운동과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조선일보의 왜곡보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정보부장 일파에게 시해되자 국민 다수는 박정희 대통령의 불행한 사망을 안타까워했다. 많은 국민들은 유신체제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일단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고 추모 분위기에 동참했다. 그러나 박대통령에 대한 추모 행렬과는 별개로,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 불행한 사건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1972년 유신체제로 인해 후퇴한 민주제도를 복원시키기를 열망하였다. 국민들은 또한 박대통령의 서거가 일정부분 민주화 운동의 결과물이기도 했던 만큼 민주화 운동이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군부 내에는 전혀 다른 구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사건을 하나의 돌출사건으로, 즉 김재규 일당의 단순한 패륜사건으로 몰아붙이면서 상층부만의 교체를 통한 기존 정치체제의 연장을 도모하려 한 세력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군부세력의 재집권을 구상한 핵심 세력은 박정희 정권하에서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만들고 권력에 가까운 군 요직을 독점한 일부 ‘정치군인’들이었다. 1979년 12월에 발생한 ‘12‧12 사태’는 바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심이 된 이들 정치군인들이 유신체제를 연장하고 자신들 중심의 정치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본격적인 행동의 첫 단계였다.
그러나 과거로 회귀하여 군부독재체제를 계속 고수하려는 전두환 일파의 정치적 음모는 1980년 봄에 들어와 민주화세력들의 강한 저항을 받았다. 김영삼․김대중으로 상징되는 야당 지도자들은 조속한 정치일정 마련과 민주화 추진을 촉구하였다. 학생들은 전두환 일파의 민주화 저지 음모를 간파하고 집회와 시위를 통해 군부 세력에 엄중한 경고를 함과 동시에 민주화를 조속히 추진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면 조선일보는 5월 17일 군부세력이 군대를 동원하여 학생시위를 진압하기 직전 단계에서 5월 민주화 운동을 어떻게 보았을까.
정치 군인들이 12‧12사태를 일으켰을 때 꿀먹은 벙어리처럼 침묵으로 일관했던 조선일보는 1980년 5월 민주화의 봄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모호한 입장을, 조선일보식으로 말하면 중용의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5월 중순경부터는 점차 학생 시위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정치 군인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런 모습은 5‧17 비상사태가 선포되기 바로 직전인 5월 17일과 5월 18일자 신문에 잘 드러난다. 5월 17일자 신문이 나가는 날은 이미 그 전날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중단하기로 한 날이었다. 대규모 시위가 신군부에게 오히려 민주화 일정을 지연시키는 구실을 줄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5월 17일자 조선일보의 사회면은 이 기사를 주요 뉴스로 보도함과 동시에 이 기사의 바로 오른쪽에 이 기사와 거의 같은 비중으로 <‘국민반응 차갑다’ 대학 자성론>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이 기사 바로 밑에는 20대 청년이 모는 버스가 전경대원을 들이받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을 크게 게재하였다. 시위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조선일보는 5월 17일자 신문 3면에 한국신학대학장인 조향록의 <요즘이 걱정스럽다>는 칼럼을 실었다.
지금 생각 있는 국민들은 불안한 침묵 속에서 크게 걱정을 하고 있다. 그것은 정부가 정치일정을 모월 모일이라고 밝히지 않음으로써만 아니다. 그것을 밝히라고 요구하며 정치일정의 단축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에 대하여 더 큰 걱정을 한다. … 국민들은 어차피 나라를 정치인과 정당에게 맡겨야 할 터인데 생각하면 물가에 선 어린 아기에게 맡기는 심정이니 크게 걱정스럽다. 게다가 모두 대통령 중심제의 헌법개정을 주장한다. 지방자치제도 안 된 나라의 대통령중심제란 그 제도만으로도 어려움이 많을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그러한 제도를 운용할 정치인이 집권경험도 없고 그 정권을 담당할 정당이 능히 그 정부를 규제하고 조종할만한 능력도 갖추지 못한 처지에서 나라 대권을 맡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크게 걱정스럽다.
조향록의 칼럼은 기성 정치권과 민주화세력들을 비난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조향록은 기존 정치인들에게 나라를 맡기는 것은 물가에 선 어린 아기에게 나라를 맡기는 것과 같은 심정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곧 기존 정치인들에게 정부를 맡겨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마찬가지이다. 조씨의 말대로 당시의 정치인들에게 오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 정계를 주름잡던 김영삼, 김대중은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국민적 지지를 받아왔고, 김종필은 5‧16 이래 권력의 핵심 자리를 지키면서 집권 경험을 쌓아왔다. 그런데 이들 정치인 모두가 정부를 맡을 자격이 없다고 말한 조향록은 기존 정치인들의 대안으로 누구를 생각하고 있었을까? 여기에 대한 답은 곧 군인의 정치개입을 부추기는 듯한 다음 구절에서 바로 찾을 수 있다.
민주정치에 있어서 군대가 정치적 중립에 있어야 함은 철칙이요 상식이다. 그러나 나라의 기틀이 흔들리고 적의 침략이 예상되는 시점에서 군인이 아닌 승려인들 어찌 팔짱을 끼고 있을 것이며, 자기와 자기 처자식의 생명마저 노리는 자들에게 생리적 반항인들 안 보일 수 있겠는가?
조씨는 당시 시국을 나라의 기틀이 흔들리고 적의 침략이 예상되는 시점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이는 기성 정치인이 아닌 제3자가 정치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기 위한 일방적인 상황진단에 불과하였다. “군인이 아닌 승려인들”이란 말은 곧 승려와 같은 종교인도 가만히 있지 않을 상황인데 군인이 가만히 있어야 되겠느냐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결국 조씨는 기존의 정치세력들로는 안 되며 군인들이 이들을 제치고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을 이렇게 간접 화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칼럼이 나간 바로 다음날 신군부가 5‧17계엄확대조치를 취한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문사의 정식 의견이 아닌 국외자의 칼럼은 원칙적으로 신문사의 견해와 무관하다. 그러나 어느 신문사나 대개는 신문사의 논조와 비슷한 성향의 칼럼니스트를 선호한다. 조선일보가 군부의 개입을 부추기는 듯한 조향록의 칼럼을 게재한 것은 충분히 오해를 살만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후 조선일보의 행적이 조향록의 시국관과 너무나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신군부 세력은 5월 17일 밤 24시를 기하여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를 폐쇄했으며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10월에 단행한 10월유신과 유사한 성격의 조치였다. 신군부세력들은 이 조치와 함께 김대중 등 야당 인사들을 체포, 구금, 혹은 연금시켰고, 대학에는 군대를 진주시켜 공포 정국을 조성하였다.
5‧17 조치 직전 이미 군부의 등장을 예견한 듯 했던 조선일보는 5월 18일자 신문에서 5‧17 조치를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하였다. <정치활동 일체 금지>를 표제어로 선택한 신문은 <포고령 10호 전문>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또 5월 18일자 신문은 사회면 머리기사로 <예약 취소사태 … 외국 관광객>을 뽑았다. 중간 제목으로 <대학생 시위 등 국내정세 불안으로>, <4천명이 ‘못 가겠다’>, <매일 30-40% 취소 전화>, <투숙률 50%도 못 채워> 등을 나열하였다. 조선일보의 이 보도들이 완전히 근거가 없는 내용은 아닐 것이다. 연이은 시위사태는 외국 관광객들을 불안하게 할 충분한 소지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조선일보의 기사내용은 그 의도가 뻔히 들여다보이는 것이었다. 국내 정세가 불안해 관광객이 불안을 느꼈다면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한 10‧26사태 직후부터라고 해야 옳다. 그런데 왜 하필 5‧17조치가 발표된 바로 다음날 이 문제를 사회면 머리기사로 부각시켰을까? 조선일보는 결국 이런 종류의 기사를 통해 국민들의 불안감을 자극하고 우리 국민이 살려면 5‧17 조치와 같은 비상조치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신군부가 계엄령을 확대 실시한 다음날 광주에서는 학생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세력과 신군부가 투입한 계엄군 사이에 큰 충돌이 벌어졌다. 이 충돌은 맨 처음 전남대 정문 앞에서 시작되었다. 정문 앞에서 5‧17조치와 휴교 및 학교 정문 폐쇄에 학생들이 항의하고 계엄군이 이들을 유혈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건이 확대되었다.
계엄령 확대 후 광주에서 비극적인 사태가 전개되고 있는 동안 조선일보가 간접적으로나마 이 사건에 대하여 견해를 피력한 것은 5월 20일자 사설을 통해서였다. 1면 머리기사로 <김종필․김대중씨 연행>을, 그리고 1면 왼쪽에 전두환 정보부장 서리의 회견 기사인 <한국 실정에 맞는 정치제도 필요>를 실었던 조선일보의 이날 사설 제목은 <백척간두에 서서>였다. 사설은 고난에 찬 민족의 역사를 열거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실로 고난에 찬 민족이다. ‘10‧26’ 이후 마침내 ‘5‧17조치’까지를 맞은 우리의 만감이 이 한마디에 담겨진다.” 사설은 최규하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 비상계엄을 전국화하는 ‘5‧17조처’를 취하면서 이 위기를 극복할 것을 국민에게 호소했다고 전한 후 최 대통령의 호소문을 아래와 같이 인용하였다.
북괴의 격증하는 적화책동이 학원소요를 고무 선동하고 있는 가운데 일부 정치인, 학생, 근로자들이 조성하고 있는 혼란과 무질서가 우리 사회를 무법천지로 만들고 있으며 이와 같은 사태가 경제난까지 극도로 악화시켜 바야흐로 국기를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할 우려가 있다.
사설은 최대통령이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부득이 ‘5‧17조치’를 취한다고 밝히고 국민의 협조를 호소했다고 덧붙였다.
조선일보는 이 사설이 가치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했다고 주장하고 싶어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5‧17 조치’가 쿠데타에 가까운 행위였고, 광주사태도 ‘5‧17조치’를 직접적인 배경으로 하여 발생했다는 점에서 조선일보의 태도는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언론의 정도를 견지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일보는 민족사의 비극을 마치 불구경하듯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단순히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중립적인 자세를 견지하려면 ‘5‧17 조치’를 변호하는 최규하 대통령의 담화 내용만 소개할 것이 아니라 이 조치에 대한 민주화 세력들의 비판적 견해도 아울러 소개해야 옳았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민주화 세력들의 견해는 일체 소개하지 않고 오직 군부 세력들의 논리만을 소개하는 데 그쳤다. 게다가 최규하 대통령의 담화 내용에 대한 인용 자세에도 문제가 있었다. 사설이 인용한 최 대통령의 담화내용은 마치 학생들의 시위가 북괴의 적화책동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사실 왜곡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사설은 일부 정치인, 학생, 근로자들이 혼란과 무질서를 조성하고 있다는 군부세력의 일방적 논리만을 소개할 뿐 시위의 근본 원인, 즉 군부 세력들의 정치적 음모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중립적인 것처럼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군부세력의 ‘5‧17 쿠데타’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정당화한 것에 불과하였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중립을 가장한 편파 보도였다.
5‧17조치는 민주화 운동에 치명타를 가하였다. 민주화 세력들은 지하로 잠적하고 신군부 세력들이 정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러나 광주에서만은 예외적인 상황이 전개되었다. 대학생과 시민들이 군부의 계엄령 확대에 반발하여 거리로 뛰쳐나온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광주에서는 학생을 중심으로 한 민주 저항세력과 신군부의 전면 대결이 전개되었다. 그것은 권위주의 체제로의 복귀와 민간 민주 정부의 구성이라는 매우 상반된 정치적 목표를 둘러싸고 이루어진 힘의 투쟁이었다. 또한 그것은 민간사회가 새로이 탄생하려는 권위주의 정권을 저지하려는 필사적인 시도였다(김영명 1999, 239).
수천 명의 사상자(死傷者)를 내면서까지 필사적인 저항을 펼쳤지만 광주는 결국 군부세력들에 의해 무력 점령되었다. 광주민중항쟁은 단기적으로는 분명히 실패한 운동이었으며 또한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비극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광주민중항쟁은 중․장기적으로는 성공한 운동이었다는 것이 그 후 역사를 통해 증명되었다. 먼저 광주민중항쟁은 새로 등장한 전두환 독재정권의 정당성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으며(정해구 1999, 85), 1980년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향점이 되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그것은 정부 차원에서까지도 한국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된 역사적 사건으로 재평가 받았다. 특히 이 항쟁은 1987년 6월항쟁과 함께 80년대의 민주화 운동과 1990년대 민주정부의 등장을 가능케 한 배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세와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큰 전환점 역할을 했다. 이 항쟁은 또한 한국 전쟁 이후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던 진보적 민중운동의 복원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손호철 1996, 481). 1980년 당시로만 보면 실패한 사건이었지만 길게 보면 한국 민주주의와 민족운동 그리고 진보운동의 중요한 전환점 역할을 한 운동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일일의 역사를 기록한다는 언론이 실제로 어떤 보도 태도를 취했는가를 살피는 것은 언론의 역할 및 정체성 문제와 관련하여 그 의미가 적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이 시기 대부분의 언론기관은 민주주의가 질식상태에 빠지고 수천 명의 생명이 국가권력에 난도질당하는 극단적 상황에서도 오로지 방관자적 모습만 보였다. 언론통제가 극심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심지어는 광주민중항쟁과 같은 비극적인 상황에서 개인적 출세와 사세 신장을 위해 신군부에게 아부하고 양민에 대한 학살과 권력찬탈행위를 정당화하는데 앞장선 언론인과 언론기관도 있었다. 조선일보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일보는 광주사태가 발생한 지 5일째 되는 5월 22일자 신문에서 최초로 광주사태를 보도하였다. 기사는 광주지역 소요가 난동현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계엄사령부의 발표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는 형태였다. 즉 조선일보는 사건의 원인으로서 “전국비상계엄이 선포되자, 서울을 이탈한 학원소요 주동 학생과 깡패 등 현실 불만세력이 대거 광주에 내려가 사실무근한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퍼뜨린 데에서 기인됐다”고 보도하였다. 이 기사에서 광주 시민과 학생들은 소요사태의 종속변수에 불과했다. 오직 서울의 운동권 학생들과 깡패들이 소요를 일으키고, 또 소요를 주도한 것이다. 이날 신문에는 또 광주사태를 고정간첩과 연결시킨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말을 여과없이 그대로 반복하여 보도하였다.
조선일보는 22일 첫 보도 이후 계속해서 광주사태를 중요 기사로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기사제목들이 거의 대부분 선정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들이었다. 시위를 주도한 인물들에 대한 보도도 왜곡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건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파괴, 난동 등 부정적인 용어들만을 골라 사용하였다.
22일과 23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광주 관련 기사의 제목들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폐허같은 광주 … 데모 6일째>
<파출소․방송국 등 불타>
<상가 철시 … 곳곳에 불탄 차>
<목포선 복면쓰고 시위>
<불탄 잔해 등 참극 되새겨>
<간첩 용의자 3명, 시민이 잡아 인계>
기사 내용도 제목처럼 부정적 이미지를 증폭시키고 있다.
22일 현재 군과 경찰이 전남 도청에서 철수한 뒤 광주시는 일부 무장한 폭도에 의해 장악되어 행정은 완전히 마비됐다.
소요는 21일 목포로까지 번져 한때 광주에서 내려간 폭도에 의한 과격행위가 있었다.
5월 25일자 신문에는 조선일보를 대표하는 언론인 중 한 사람인 김대중 기자(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가 실명으로 보도한 기사가 나오는데 기사제목은 <무정부 상태 광주 1주>이다. 이 기사에는 중간 제목으로 <총들고 서성대는 ‘과격파들’, 길목서 저지 … 총기반납 지연>, <시민들 생필품 동나 고통스럽다> 등이 이어졌다. 7면 머리기사인 이 기사내용의 일부를 인용해보겠다.
그 고개의 내리막길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고 그들 쪽 너머에 ‘무정부상태의 광주’가 있다. 쓰러진 전봇대, 각목, 벽돌 등으로 쳐진 바리케이드 뒤에는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인다. 그 뒤편의 거리는 차가 없어 더욱 넓어 보인다.
이러한 보도 내용들은 물론 사실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광주는 난동자나 폭도들에 의해 장악된 것이 아니라 군사정권에 항의하는 학생과 시민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자들을 난동자들로 몰아버리는 이런 보도 내용은 결과적으로 광주 사태의 진상을 알리기보다는 오히려 왜곡시키는데 기여했다. 광주사태가 왜 발생했는지에 대한 언급 없이 시민들이 군과 경찰에 대항한 사실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고, 또 이들을 폭도로 몰아붙이는 편파적 보도를 하여 결과적으로 광주민주화 운동을 다른 지역민들과 고립시키고 광주의 이미지를 매우 부정적으로 각인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또 이런 왜곡보도를 통한 광주시민의 고립화는 광주민중항쟁을 실패하게 만든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광주 시민들을 육체적으로 테러하고 학살한 것이 군부세력들이었다면 광주 시민들을 정신적으로 매도하고 고립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언론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이 발발한 지 25년째 되어가는 지금도 일부 국민들은 이 때 언론에 의해 각인된 부정적 이미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정도이다.
신군부는 5‧17 계엄확대조치와 함께 김대중 죽이기 작전에 들어갔다. 소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이라는 것을 발표하여 김대중이 유혈혁명과 정부 전복을 통해 집권을 기도했다고 발표하였다. 김대중이 북괴를 지원하는 한민통 의장 노릇을 6년이나 하였고, 이 과정에서 거액의 불순 자금을 받았다는 내용도 발표하였다. 신군부가 이렇게 김대중 죽이기 작전에 나선 것은 사회 혼란의 조성 책임을 그에게 돌리고, 그와 같은 구시대적 정치인들을 대신해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해야 하며, 그 대안세력은 자신들뿐이라는 논리를 만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집권과정에서 정상적 방법으로는 국민의 동의를 얻기가 어려웠던 신군부는 기존의 냉전논리와 특정정치세력을 결부시키고, 또 여기에 민주화 요구를 단순히 지역주의적 감정의 발로로 왜곡시키기 위해(정근식 1997, 169) 김대중이라는 희생양을 만들어 낸 것이다.
조선일보는 신군부의 이와 같은 김대중 죽이기 작전에도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광주사태의 원인을 김대중씨와 연결시킨 계엄사령부의 조작내용을 아무런 비판 없이 대대적으로 보도․홍보한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는 7월 4일 발표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을 보도하기 위해 1면 머리기사 외에 광고란까지 포함한 3면과 6면 전체를 할애하였다. 8월 15일자 신문에 보도된 군사재판 기사는 더욱 심하였다. 먼저 조선일보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은 <김대중 등 24명 첫 군재>이었다. 중간제목은 <학생데모 조종․내란 선동>과 <조총련과 손잡고 ‘반한’ 주도>이었다. 이날 신문은 1면 기사에 이어 4, 5, 9, 11, 12면 전체를 김대중씨에 대한 공소장 내용으로 채웠다. 지난번처럼 광고란까지 모두 김대중을 비판하는 공판 기사로 채웠다.
조선일보는 왜곡보도에 대한 비판에 직면할 때면 항상 상황론을 펼치곤 한다. 언론검열과 감시라는 외적 상황에서 조선일보라고 독야청청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조선일보측의 주장대로 언론검열과 탄압이 극심했던 1980년의 상황에서 조선일보가 언론 본연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상황론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악조건 속에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려 한 흔적은 남겼어야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조선일보가 남겨 놓은 흔적이란 당시 언론 중에서도 가장 앞장서 신군부에 협조했다는 기록뿐이다.
80년 당시 언론자유를 위해 투쟁하다 해직당한 윤석한은 광주항쟁을 전후로 몇 몇 언론사 경영진과 수구 언론인들이 신군부와 긴밀한 접촉을 통해 유신시절보다 더욱 화려한 날개짓을 펴 나갔다고 주장하고, 당시 제도 언론 중에서 이런 행태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곳은 조선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 등 3개사였다고 지적하였다. 다른 언론사라고 특별히 나을 것도 없었지만, “언론이기조차 아예 포기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이들 3개사들의 악행과 작태는 참으로 가관이었다. 한 마디로 왜곡과 날조의 극치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 준 것이었다”는 것이 윤석한의 주장이다(한국기자협회․80년 해직언론인 협의회 공편 1997, 79).
Ⅲ. 군의 정치개입 지지와 부추김
8월에 접어들어 전두환 세력은 권력장악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제 뒤에서 조정하는 게 아니라 아예 전면에 나서 국가를 다스리려 하였다. 전두환 세력의 이런 의도를 언론기관이 모를 리 없었다. 권력이 완전히 전두환 세력에게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간파한 언론기관 사이에 충성경쟁이 시작되었다. 신군부의 시책이면 무조건 지지하며, 전두환 보안사령관에 대한 날조된 찬양작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희대의 사기극이 벌어진 것이다(윤석한 1997, 81). 조선일보는 이 사기극의 충실한 홍보병 노릇을 하였다.
조선일보의 8월 7일자 신문의 1면 머리기사는 전두환 국보위위원장의 조찬기도회 인사말에 관한 것이었다. 내용은 그렇다 치고라도 기사제목으로 선택한 <국운개척 사명 기필코 완수>나, 옆에 중간제목으로 따라붙은 <후손에 복지국가 물려줘야>, <지금은 사심없이 단결, 나라 기틀 바로 잡을 때> 등은 은연중 조선일보의 시각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8월 12일자 신문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은 <민주․복지․정의사회 구현>이다. 전두환 상임위원장이 80년대 과제를 밝히면서 말했다는 내용을 기사화한 것인데 중간제목은 <지금이 나라 살릴 마지막 기회>와 <정치일정은 앞당겨 질 수도>로 되어 있다. 조선일보는 이 기사에서 전두환씨를 가리켜 “새 시대를 영도할 지도인물로 국민적 기대와 관심을 모으고 있다”고 추켜세웠다.
최규하 대통령은 군부세력의 음모에 따라 8월 16일 대통령직을 사퇴하였다. 최규하가 10‧26 사태 후 엉겁결에 대통령 자리를 물려받기는 했지만 국민들은 그가 박대통령 서거 후의 과도기를 잘 이끌어 국민적 지지를 받는 민주정부를 탄생시키고 명예롭게 물려나기를 기대하였다. 최규하 대통령 역시 그런 꿈을 갖지 않았을 리 없다. 최소한 누군가에 쫓겨 강제로 물러나는 신세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꿈은 무산되었다. 12‧12 사태 후 전두환 세력에 포위된 채 꼭두각시 노릇만을 하다가 광주사태를 비롯한 모든 사태의 책임을 떠안고 물러난 것이다. 불행한 헌정사의 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일보는 최대통령의 사임소식을 8월 17일자 신문의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한 후 사설을 통해 신문사의 입장을 피력하였다. 사설은 먼저 최대통령이 어려운 시기에 대임을 성심껏 수행해 왔다고 추켜세웠다. 최대통령의 하야를 가리켜 “정치도의상의 책임을 통감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대국적 견지에서 거취에 결단을 내린 것은 우리 헌정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요 그의 인격의 발로로 봐야 할 것이다”고 칭찬을 하였다.
그러나 최규하의 대통령직 사임에 대한 조선일보의 논평은 옳지도 않고 정직하지도 않다. 우선 대통령의 사임을 그의 책임의식의 발로로 해석한 것은 올바른 평가가 아니다. 사실 최대통령의 하야는 당시 상황에서 책임 있는 정치인의 행위가 아니라 거꾸로 무책임한 행위였다. 군의 하극상을 초래하고 정치불안을 야기한 전두환 일파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그 당시 최대통령이 해야 할 진짜 일이었다. 그렇게 하고 나서도 대통령으로서 책임을 느낀다면 그때 가서 물러나면 되는 것이다. 또 조선일보가 굳이 책임문제를 거론하려 했다면 일련의 사태에 대해 더 근원적인 원인을 제공한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의 책임도 함께 거론했어야 옳았다. 조선일보의 사설은 조선일보 측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숨기고 마음에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았다는 점에서 정직하지도 않았다. 조선일보의 진짜 속마음은 최대통령의 사임이 예상보다 빨리 이루어짐으로써 조선일보가 고대하던 전두환의 대통령직 인수가 앞당겨진데 대한 반가움이었다.
조선일보가 전두환에 관한 기사들을 대서특필할 무렵 전두환 진영은 헌법개정을 논의하고 있었고, 그 내용의 핵심은 나중에 밝혀진 것처럼 체육관 선거로 불려진 간접선거제였다. 전두환 진영이 그러한 헌법을 만들어 공개하기 전 조선일보는 8월 9일 대통령 선거를 주제로 한 좌담 기사를 실었다. 좌담 기사의 제목은 <우리에게 맞는 대통령선거>였고, 중간제목은 <‘간선-반민주’는 정략적 흑백론>이었다. 이 좌담기사 내용은 당시 조선일보 기자들이 상황을 어떻게 인식했으며, 그들의 역사의식이 어느 수준에 머물러 있었는가를 가름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 같아 일부 내용을 소개하겠다.
우선, 대통령선거 방식을 논의한 정치부 기자들의 좌담 내용은 직선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간선제를 채택해야 한다는 주장들로 채워져 있다. 좌담에 참석한 기자들은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방식은 부패와 분열을 조장하고 엄청난 규모의 낭비를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직선제론을 가리켜 정치 현실을 무시한 뿌리 없는 허구이론으로 몰아붙였다. 기자들은 우리 국민들이 “광주사태 등의 발생에 이르기까지 6개월 동안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우리의 정치현실을 보았고, 직선제 논리의 허구 같은 걸 인식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나라는 극단적 이상론을 즐길 만큼 팔자 좋은 나라가 아니라는 주장도 나왔다.
좌담에 참석한 한 기자가 간선제 방식을 언급하면서 “우리 현실에 부합되고 국민다수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최선의 헌법안을 만들어보겠다는 정부측의 열의는 금방 감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고 아부성 발언을 한다. 그러자 다른 기자는 직선제는 권력욕에 눈 먼 3김씨들의 열망이었는데 이제 그들이 정치일선에서 퇴출된 만큼 의미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다른 기자는 직선제 주장이 사라지고 간선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국민이성의 회복이라고 말하였다. 과거에 학자들 가운데도 현실분석이 정확한 사람들은 간선제가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개진했으나 빛을 보지 못했다는 발언도 나왔다.
한 기자가 간선제의 장점을 이야기하면서 “미국 같은 순수 대통령제의 원조도 선거인단 방식에 의한 간선제가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간선제의 구체적인 형태 이야기가 나오자 말이 바뀌어진다. 미국식 간선제는 순수한 간선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두환 측에서 고려하고 있는 간선제가 미국식 간선제와 전혀 다른 내용이라는 것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선거인단 방식은 사실상 직선제와 유사한 과열을 빚고 있는 게 아닙니까”라고 말하면서 미국식 간선제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못박고 있다. 이 좌담회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했는지는 좌담회의 마무리 발언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맨 마지막 발언자가 우리의 최근 정치현실을 거론하면서 “어차피 헌법이 현실역학에 좌우된다는 게 사실이라면,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현실정치의 주도세력이 뿌리를 빨리 내리는데 효과적인 방식이 어떤 것이냐를 살펴보는 게 가장 쉬운 접근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전두환 측이 추진한 간선제 헌법이 가장 효과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참고로, 조선일보는 1972년 11월 유신헌법안이 확정되자 11월 23일자 신문의 사설을 통해 3권분립과 대통령 직선제를 토대로 한 3공화국 헌법을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옷으로 규정하고 새로 만든 유신헌법안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한 바 있다. 유신헌법안의 채택으로 인해 “우리는 이제 우리나라에 맞는 제도와 기구를 마련하게 되었고 전체 국민의 단결된 힘을 확인하게 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980년 8월 조선일보 기자들이 다시 같은 주장을 반복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전두환 국보위원장은 8월 19일 전국대학 총․학장과의 모임에서 학원사태에 대한 강경책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 모임에서 “대학은 진리 탐구의 수련장이어야 하며 결코 질서파괴의 진원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앞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학원 내외의 소요사태는 일체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이 기회에 가두시위의 악습은 다소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근절시키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전두환 위원장의 이런 발언은 실제로 공갈이 아니었다. 이 무렵 시위를 한 수많은 학생들이 구속되고 제적되었다. 경찰이 대학에 상주하였고, 학원은 완전히 병영화되어 갔다. 전두환 위원장은 교수들에게도 “국가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마디로 말하여 데모 막는 데 열중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조선일보는 전두환 위원장의 이런 발언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뉴스가치가 크다고 판단했는지 전두환 위원장의 이날 발언은 다음날(8월 20일) 신문의 1면 머리기사로 다루어졌다. 기사 제목은 <학원소요 희생 있어도 근절>이었다. 이렇게 전두환의 협박내용을 톱뉴스로 보도한 조선일보는 다시 전위원장의 발언을 지지하는 사설을 내보냈다. 사설 제목은 <학원의 안정과 쇄신>이었다. 사설은 전두환 위원장의 협박성 기자회견내용을 소개한 다음 교수들에게는 학생지도에 철저를 기하고 학생들에게는 전위원장의 방침에 순응하라고 충고하였다.
바라건대 학생들은 지난날의 쓰라린 경험들을 냉정히 자성하고 심기일전하여 앞으로 학원의 문이 열리면 자중자애, 나라와 개인의 긴 장래를 생각하면서 면학에 힘쓰고 명랑한 학원에서 소정의 과정을 훌륭히 이수했으면 하는 것이다. 이제 학원에도 새로운 변혁의 바람이 불고 있는 때, 우리는 한국의 대학들이 참된 학문의 전당으로 될 것을 기대해 마지않는다.
사설은 전두환 위원장의 발언의 문제점은 하나도 지적하지 않고 오직 학생들만 변화하라고 요구한다. 왜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으며, 왜 최근의 사태가 초래됐는지에 대한 원인 규명은 없이 오직 전두환의 명령에 따르라는 주장만 늘어놓았다. 그것도 과거 학생들이 저지른 행동에 대하여 반성하고 자중자애하면서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사설은 “이제 학원에도 새로운 변혁의 바람이 불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도대체 여기서 말하는 변혁의 바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두환 치하의 학원은 한마디로 말하여 ‘학원의 병영화’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경찰이 상주하고 교수들은 연구보다는 학생지도에 더 신경을 써야 했다. 여기에 맞서 학생들은 시위를 일상화하였고, 수배․구속․자살이 속출하였다. 이런 모습이 조선일보 사람들의 눈에는 변혁이고 긍정적인 모습이란 말인가.
8월 22일 서부전선에서는 군인 전두환의 퇴역식이 열렸다. 전두환이 군복을 벗고 형식상 민간인의 신분으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이 퇴역식에서 전두환이 행한 발언은 다음날 조선일보의 1면 머리기사로 다루어졌다. 기사 제목은 <새역사 창조에 신명 바치겠다>이다. 사대-안일의 구시대가 퇴조하는 것은 역사 발전의 순리이며,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을 수립하고 우리에게 알맞은 민주제도를 확립 토착화시키겠다는 전두환의 발언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모습이다. 그러나 이날 조선일보 기사의 압권은 ‘팔면봉’(八面鋒)이었다. 이 란에는 네 종류의 논평이 실렸는데, 그 중 세 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통대소집일 공고.
새 역사의 장이 열리는 날,
8월은 정녕 민족의 달.
전두환 장군의 전역사.
평화적 정권교체, 구시대의 퇴조,
모두 국민의 마음.
오랜만에 정상으로 돌아선 기온.
천시-지리-인화의 삼위일체인가.
첫 번째 내용의 소재를 제공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유신체제하에서 박정희 독재권력의 거수기 노릇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으로, 박정희 사후에는 새로운 독재자 전두환의 정권탈취를 정당화하는 기관으로 활용된 기관이다. 그런 기관이 소집된 날이 ‘새 역사의 장이 열리는 날’이라고 표현한 것도 우습지만 ‘정녕 민족의 달’이란 말은 정말 낯간지러운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전두환 장군이 권력을 잡는 것이 국민 모두의 마음이라는 표현은 조선일보의 상투적인 표현법이라고 치고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그러나 아무리 어용 언론을 자처하기로서니 전두환의 권력장악 행위를 찬미하기 위하여 ‘천시-지리-인화의 삼위일체’라는 표현까지 동원해야만 했는가. 이러고도 왜곡보도의 책임을 모두 언론통제 탓으로 돌리고, 조선일보는 주어진 조건속에서 언론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8월 22일 육해공 3군 지휘관들은 주영복 국방부장관 주제로 국방부에서 회의를 갖고 전두환을 차기 국가 원수로 추대할 것을 결의하였다. 12‧12사태 후 군의 정치개입이 노골화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거론한 바이지만, 이날 육해공 3군 지휘관들의 결의사항은 군의 정치개입의 결정판이었다. 조선일보가 이 결의사항을 그대로 지나칠 리 없었다. 3군 지휘관들의 전두환 추대 결의가 있은 다음날 사설에서 바로 군의 결의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와 같은 보도를 접하고 국민일반은 크게 안도와 고무(鼓舞)를 간직했을 것으로 우리는 믿는다. 이로써 비록 그것이 나라 장래를 염려하는 애정(哀情)에서의 기우였다 하더라도, 우리 내부에 이제 일체의 기우의 요소는 깨끗이 사라진 것으로 확신하게 되기 때문이다. …
‘8․21 군 결의’는 이러한 국민의 기대와 신뢰를 한층 더 공고히 뒷받침하고 보장하는, 일찍이 없었던 국가 간성들의 담보의 표징이다. 건국이래 모든 군이 한 지도자를 전군적 총의로 일사불란하게 지지하고 추대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그러한 점에서 <8․21 군 결의>는 또한 역사적으로 깊은 함축을 간직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위의 글에서 우리는 조선일보가 군의 정치개입을 고대하고 있었음을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된다. 또 군이 10‧26 사태 이후 정치개입 문제로 설왕설래할 때 조선일보가 초조함을 느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8․21 결의’는 조선일보의 그런 초조함을 씻어주기에 충분할 만큼 정치군인들이 단결을 과시한 사건이었다. 조선일보는 “건국이래 모든 군이 장차 한 지도자를 전군적 총의로 일사불란하게 지지하고 추대한 예가 없었다”고 말하면서 이번 결의를 역사적으로 뜻깊은 행위로 묘사하였다. 그런데 이 구절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모든 군이 전두환을 국가원수로 추대했다는 말 자체가 거짓이기 때문이다. 전두환을 국가원수로 추대한 것은 모든 군이 아니라 소수의 정치군인들일 뿐이었다. 60만 군인의 절대다수는 소수 정치군인들의 결의와는 전혀 무관하다. 그러면 지휘관들은 모두 전두환을 지지했는가? 그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군의 정치개입을 반대한 군 간부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것은 그 당시에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모든 군이 전두환을 지지했다고 사실 왜곡을 하고, 더 나아가 이렇게 전군이 한 지도자를 지지하고 나선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감히 역사까지 왜곡하고 있다. 군인들이 전두환을 국가원수로 추대한 것에 국민들이 안도하고 고무되었다는 주장도 틀리기는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순전히 조선일보가 꾸며낸 말에 불과하였다. 조선일보의 생각을 국민 일반의 정서로 둔갑시켜 마치 우리 국민 다수가 군의 정치개입을 기대한 것처럼 사실 왜곡을 하고 있다. 백보 양보하여 군이 전두환을 지지했다고 하자. 그게 뭐가 자랑스러워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인가? 우리나라의 민주적 전통이 약한 결과 정치가 다시 한번 군에 유린되는 슬픈 역사가 시작되었을 뿐인데 말이다. 전두환 일파의 정치 개입으로 인해 ‘12‧12 사태’와 같은 군의 하극상이 초래되고, 민주화가 무산되고, 광주사태와 같은 비극적 사건이 발발하여 우리 역사를 한참 후퇴시킨 사건을 두고 역사의 위대한 전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교언영색을 늘어놓는 조선일보가 어찌 권력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정상적인 언론기관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조선일보의 전두환 용비어천가는 8월 23일자 신문의 3면에 실린 특집기사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특집기사의 제목은 <인간 전두환>인데, 이 기사에서 조선일보가 전두환을 얼마나 극찬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몇 구절을 인용해보겠다. 먼저 전두환 조상들의 가훈에 대한 언급이다.
그는 매사에 있어 사(私)에 앞서 공(公)이고 나에 앞서 나라 걱정이다. 그의 이러한 사고는 어려서부터 ‘의가 생명보다 중하니라’고 조상 대대로 구전돼 내려오고 있는 가훈에 영향을 받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어떤 인물을 칭찬할 때면 부모나 조부모까지를 거론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전두환이 훌륭하게 된 것은 아예 조상 대대로 내려오고 있는 가훈의 영향 때문이라고 선전하였다. 전두환의 지도력을 칭찬하는 대목도 낯간지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전두환의 통솔력을 칭찬하기 위해 “전장군의 밑을 거쳐간 부하장교는 그의 통솔방법을 3분의 1만 흉내 내면 모범적 지휘관이란 평을 얻을 수 있다는 게 군내의 통설로 되어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전두환을 추켜세우기 위해 동기생과 비교한 부분도 과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동기생의 말이라고 전하면서 “동기생일지라도 어쩌다 그를 대할 때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암벽을 대하는 느낌이 들 때가 없지 않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돌 정도다”라고 말한 것이다.
전장군의 청렴성에 대한 언급도 나왔다. “그에게서 높이 사야할 점은 아무래도 수도승에게서나 엿볼 수 있는 청렴과 극기정신”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인물에 대한 칭찬을 목표로 한 기사니까 인사말로 청렴성을 이야기할 수는 있다고 치자. 그러나 어떻게 전두환의 청렴성을 수도승의 경우에 비유하고 싶었을까? 이 기사를 쓴 기자와 조선일보 관계자들은 전두환이 대통령 재임 중 수천억 원의 비자금을 거두고, 그 중 상당액을 임기 말까지 간직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퇴임 후 감옥살이까지 한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기사 내용 중에는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해 친척들에 대해서도 부당한 일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전두환의 재임 중 전경환 등 형제들과 처삼촌, 처남들이 권력 남용 및 부정부패의 죄목으로 줄줄이 감옥살이를 한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권력은 어느 한 개인만의 소유물은 아니다. 혼자서 거대한 조직을 통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규하가 대통령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실질적인 통치를 하지 못하고 결국 도중에 하차하고 만 것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아무리 대통령의 자리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한을 갖는 자리라고 하더라도 정치군인들의 틈새에서 혼자 힘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라도 권력이동의 진실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최고 지도자의 교체뿐만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세력과 조직의 존재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E. H. 카의 말대로 역사가 “하나의 사회적 과정이며”, “개인은 사회적 존재로서 이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라면(카 1993, 83) 최규하의 하야와 전두환의 등장은 그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군부세력과의 연관 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조선일보는 바로 이 점에서 영리한 신문이었다. 권력에 아부하고 권력과 결탁하려면 최고지도자만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세력과 조직에게 아부하고 점수를 따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부터는 조선일보가 전두환 개인만이 아니라 군부 세력에게 어떻게 접근해고 아부했는지를 살펴보겠다.
먼저 8월 24일자 사설을 통해 살펴보겠다. 사설 제목은 <길-새로운 길잡이가 나타나는데 붙여>로 되어 있다. 사설은 우리가 냉철한 이성으로 한 가지 조용히 생각해 볼일이 있다고 말하면서 군의 정치개입 문제를 꺼냈다. 이 사설에서 강조한 것은 군의 정치개입은 나쁜 것이 아니며, 당시 시점에서 군이 권력을 떠맡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사설은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를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거기 더하여 군의 정치적 중립을 지나치게 통념적으로 받아들인 것에 대한 반성적 고찰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가 이제까지 정치참여의 원칙을 시민적인 범주 안에서만 생각해온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정치인, 언론인은 물론 대학생, 교수, 기업인, 노동자, 농민 그리고 문화 예술인에서 목사, 신부, 승려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국민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면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군인만은 절대적인 중립을 지키고 오로지 군사적인 임무에만 전념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데에는 분명히 사고와 인식의 맹점이 있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군대는 단순한 용병집단인 외국의 외인부대가 아닌 것이다.
조선일보는 정치참여 문제에서 군인이 차별받은 데 대하여 매우 분노한 모양이다. 정치인이나 언론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신부, 승려,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는데 유독 군인만 정치를 못하게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조선일보의 이 사설의 내용은 5‧17 계엄확대조치가 취해지기 직전인 5월 17일 조향록이 조선일보에 <요즘이 걱정스럽다>는 칼럼을 기고하여 군부의 정치개입을 부추기는 듯한 발언을 한 것과 너무 유사하다.
조선일보의 말대로 대한민국 군대는 돈 받고 국토방위나 해주는 용병이 아니다. 그들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아들과 딸들이며, 누구보다 강한 애국심과 국가 및 국민에 대한 헌신성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러나 사설의 서두에서 말한 대로 냉철한 이성의 힘으로 한번 생각해보자. 지금 민주주의 제도를 정상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나라들 중에 군인들의 정치개입을 공식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 80년을 기준으로 할 때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한지 33년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혁명도, 쿠테타도 경험했고 많은 피도 흘렸다. 그런데 아직도 군인들의 정치개입의 정당성을 교수나 기업인, 문화, 예술인 등 민간인의 정치 참여와 같은 선상에서 설명하는 신문사가 있다니 개탄스러울 뿐이다. 백보 양보하여 모든 직업군에 공정한 잣대를 적용하여 정치참여의 문제를 논의해보자. 교수나 기업인, 언론인, 신부, 목사, 대학생들 중에 어느 집단이 3군 지휘관들처럼 한자리에 모여 자기 집단의 대표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자고 결의한 적이 있었는가. 어느 직업군이 무력을 동원하여 권력을 농단한 적이 있었는가.
조선일보는 같은 날 <새 시대 개막과 새 정치>라는 정치부 기자 좌담기사를 실었다. 이 좌담에 참여한 기자들은 전 장군의 전역을 ‘파워 엘리트 교체’로 규정하고 <가장 잘 훈련․조직된 군부엘리트, 도덕성․성실성 높고 추진력 강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전에 있었던 정치부 기자들의 좌담기사에서 역점을 두었던 내용이 직선제의 폐해와 간선제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것이었다면 이번 좌담 기사의 목적은 군부와 전두환의 권력 장악을 필연적인 것으로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좌담에 참여한 기자들은 새 대통령 선출을 위한 통대의 집회소집 공고와 전두환 장군의 예편식을 가리켜 “그동안 많은 국민이 기다려온 새로운 시대의 개막”으로 표현하였다. 새 대통령의 선출은 전두환 장군에게 “명실상부한 국민적 정통성을 공식 부여한다는 역사의 일대 전환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기자들은 전장군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는 새 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현상을 “소위 파워 엘리트의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는 점”이라고 해석하였다.
기자들은 군 엘리트들의 현실참여를 시대적 경향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평화시대에는 일반적으로 군 엘리트들이 현실정치에 참여하지 못한 게 사실이지만 전통적으로 문민우위가 확고한 미국의 경우에도 양차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군 엘리트들이 정치일선에 많이 등장했다고 주장하고 또 이는 “미국의 학자들도 지적하고 있는 현상”이라고 설명하였다. 한 기자는 그 이유로 “대량살상무기인 핵 시대하의 세계평화나 미-소간 공존체제 속에서는 문관주도의 중요정책결정 등에 군부의 발언권이 필연적으로 강화되지 않을 수 없다는 측면”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덧붙여 “학자들은 앞으로도 더욱 군 엘리트들이 미국의 권력구조 속에 진출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 정치부 기자들의 말대로 미국에서 중요정책결정에 군부의 발언권이 강화되어간다고 하자. 그러나 미국에서 군부가 군사정책에 대한 전문가로서 어떤 사안에 대한 발언권을 강화하는 것과 한국의 군부가 무력을 배경으로 직접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과연 같은 성질의 것인가? 비교가 적절하려면 두 비교 단위로부터 의미 있는 일반화가 도출될 수 있도록 그 대상을 선정해야 하는데 여기서 제시된 미국과 한국의 사례는 비교하기에는 너무 부적절한 대상이다. 세계 최강의 군대를 거느리면서도 철저하게 문민 위주의 정치를 꾸려가고 있는 미국을 오히려 군대의 권력장악을 정당화하기 위한 비교의 대상으로 거론하는 조선일보 기자들의 지적 수준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기자들은 한국 군부의 정치 개입의 정당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했다.
10‧26 이후 등장한 군 엘리트들은 건국 이후의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민족혼이 깃든 한국교육을 받았다는 사실, 그 의미를 새삼 평가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차제에 직업군인에 대한 어떤 막연한 배타심 같은 걸 불식하고 실체를 똑바로 인식해주는 자세전환이 바람직할 것 같아요.
기자들은 “우리 국민이 민주국민이라면 우리 군도 민주군대”라고 전제하고, 따라서 “군의 특성이 무력을 갖고 있고 명령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획일성 때문에 군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민주는 없고 폭력만 있을 것으로 막연히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지요”라고 말하였다. 기자들은 기성 정치인과 신군부 세력들을 비교하면서 전자를 가리켜 “표를 얻는데 귀신”인 존재로 묘사한 다음, 신군부세력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우리교육을 받은 때묻지 않은 민족 세력”으로 규정하고, 따라서 기성 정치인을 신군부 세력으로 세력교체 하는 것을 시대 흐름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하였다.
요약하자면, 조선일보가 1980년에 전개된 민주화 운동을 폄하하고 신군부로 하여금 정치개입과 권력 장악을 시도하도록 부추기거나 공고화하는 과정은 크게 다음 세 가지 방식을 통해서였다. 첫 번째 방식은 80년 봄의 민주화 운동과 민주화세력 및 민간정치인들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민주화 세력들이 주장하는 직선제 헌법의 부정적 측면을 암시하고 민주화 세력들과 민간 정치인들의 과격성 및 부패 혐의를 과대 포장하여 기사화하는 것이 그런 유형에 속하였다. 둘째는 노골적으로 군부세력의 정권 장악을 부추기는 발언이다. 조향록의 칼럼이나 혹은 <새 시대 개막과 새 정치>라는 정치부 기자들의 좌담기사 내용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셋째는 전두환에 대한 홍보 및 우상화 작전이다. 전두환을 인간 이상의 존재로 부각시키고 80년 한국의 어려움을 단칼에 해결해줄 인물처럼 묘사하면서 그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유도한 것이다. 전두환에 대한 과대포장과 홍보는 물론 1988년 2월 그가 임기를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Ⅳ. 맺음말: 조선일보의 정체성, 보수냐 극우냐
조선일보는 지금도 일제시대 때의 친일행위로 민주․민족세력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조선일보는 1930년대 후반의 지면을 온통 일본 천황의 찬미와 대동아전쟁의 홍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매도, 젊은이의 지원병 참여 호소, 창씨개명을 선동하는 기사 등으로 채운 경력을 가지고 있다. 조선일보의 친일 행위는 정치기사보다 상대적으로 통제가 덜했던 경제기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이런 부끄러운 역사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전혀 반성할 줄 모른다. 해방 후 과거청산작업이 지지부진한 틈을 타 과거의 친일행위에 대한 반성은커녕 오히려 민족지 운운하며 역사왜곡행위를 저지르고 있다(최영태 2004, 219-224).
조선일보의 잘못과 역사왜곡행위는 해방 후 전개된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도 재현되었다. 1972년 유신체제의 선포를 구국의 영단이라고 추켜세웠던 조선일보의 반민주적 모습은 한국 민주주의가 큰 위기에 처했던 1980년을 통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1980년에 등장한 전두환 독재체제는 유신체제의 연장선상에서 출현했지만 질적으로는 유신독재보다 더 나빴다. 왜냐하면 유신체제는 경제개발이라는 업적을 바탕으로 등장했고, 따라서 그 평가와 관련해 양론이 존재할 수 있는 반면에, 전두환 독재체제는 신군부의 사적인 권력욕 이외에 그 어떠한 정당성도 없이 등장했으며, 게다가 광주민중들에 대한 대량 살육을 통해 등장한(정해구 1999, 84-85), 그래서 논란의 여지가 없는 폭악무도한 정권이었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그런 부당한 권력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언론 본연의 임무는커녕 오히려 앞장서서 군부세력의 권력 장악을 부추기고 독재자 전두환을 찬미하였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조선일보는 과거사에 대해 큰 반성을 해야 하며 역사 앞에 사죄해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조선일보는 친일행적에 대해서처럼 반민주적 행위에 대해서도 전혀 반성하려고 하지 않는다. 조선일보가 반성할 줄 모르는 신문이라는 것은 조선일보사의 자체 평가 내용을 보면 확실해진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사가 1990년에 발행한 조선일보 80년사에서는 민주주의 제도가 압살당하던 1980년대 전반기(1980~1984)를 다룬 제16장의 제목을 ‘시련속의 정상질주’로 명명하였다. 제16장의 소제목들로는 ‘광주의 비극’과 ‘공포정치의 시작’ 그리고 ‘시련속의 성장’이 등장한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광주의 비극’과 ‘공포정치의 시작’ 등 제16장 어디에서도 1980년의 보도내용을 사과하거나 반성하는 서술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련속의 성장’에서 1980년 한 해 동안 눈부신 성장을 이룩한 끝에 1981년 3월 창간 61주년을 맞이하여 방우영 사장이 사원들의 봉급을 20% 이상 인상해주고 1981년도 보너스를 1000%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는 자랑사항만 늘어놓았다. 1980년에 조선일보가 크게 성장한 원인분석과 관련해서는 “시의적절한 기획시리즈 연재”를 들기도 했다. 기획시리즈 중에는 신군부의 등장과 그들의 권력 공고화를 변호한 글들이 부지기수였는데 이런 분석을 버젓이 내놓는 조선일보의 대담성에 그저 놀랄 뿐이다. 유신체제가 기승을 부리던 1975년에 “생명 있는 하나의 유기체로서 한번도 언론 본연의 사명을 저버린 일이 없었음을 자부한다”(1975년 3월 11일자 1면 社告)고 주장했던 그 대담성과 과거를 반성할 줄 모르는 몰역사적 태도가 이번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민주화 운동과 광주민중항쟁을 폄하하고 군부세력의 재집권을 돕는데 앞장선 부끄러운 과거사에 대한 일언반구의 반성도 없이 오로지 사세가 성장한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는 조선일보의 모습을 보면서 조선일보가 얼마나 천박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는가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조선일보는 왜 민주화의 중요한 길목에서 매번 민주화 운동의 훼방꾼 노릇을 한 것일까? 조선일보는 왜 잘못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할 줄 모를까? 이것은 혹시라도 조선일보의 정체성에 근본적 문제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
20세기 서구 사회의 보수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의 계승자들이다. 19세기의 자유주의자들은 계층적으로는 대개 부르주아지에 속하며, 이념적으로는 계몽주의와 시민혁명의 정신을 계승했다. 그들은 또한 사유재산권의 보호와 경제적 자유를 중시하였다. 국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개 그들은 19세기 전․중반기까지는 봉건특권세력에 대항하였다. 자유주의자들은 투쟁에서의 승리 후 정치적으로는 절대군주제 및 전제군주제를 타도하고 대의제 민주주의 제도를 수립하는데 앞장섰다. 오늘날 서구에서 발달한 대의제 민주주의의 창시자는 바로 이들 자유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이 무렵만 하더라도 사회의 급진적 변혁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혁명 내지 진보세력으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박우룡1998, 72-90).
이렇게 19세기 전․중반기까지 혁명적 내지 진보적 면모를 보이던 서구의 자유주의자들은 그러나 19세기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위치와 성격을 바꾸었다. 그 직접적 계기는 산업혁명의 진전과 함께 대량으로 배출된 노동자들 및 사회주의자들의 도전이었다. 귀족세력을 제치고 역사의 주도권을 장악한 자유주의자들은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 중심의 사회에 도전하고 기존 사회의 변혁을 시도하자 태도를 바꾸어 기존 사회의 수호세력으로 변모하였다. 그들은 사회의 변화를 수용하기는 하되 점진적인 변화를 원하였고, 새로운 것보다는 기존의 틀, 즉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를, 정치적으로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그리고 계층적으로는 중산계급이 중심이 된 사회 질서를 선호하였다. 어제의 변혁세력이었던 자유주의자들이 이제는 보수세력으로 변모하고, 대신에 새로운 세력인 사회주의자들이 변혁세력 내지 진보세력의 중심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서구의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 이념 및 대의제 민주주의와의 상관관계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서구의 보수주의자들은 자유 민주주의의 창시자이며 수호자이다. 보수주의자들의 경쟁자이자 사회주의의 한 계보를 차지한 온건한 사회주의자들 즉 민주사회주의자(사회민주주의자)들 역시 대의제 민주주의의 충실한 신봉자이기는 마찬가지이다(최영태 1998, 510-511). 서구에서 보수주의자들과 민주사회주의자(사회민주주의자)들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양 축을 이루면서 선의의 경쟁자가 되기도 하고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때에는 힘을 합쳐 그것을 수호하는 협력자가 되기도 했다. 이들 민주주의 세력에 맞서 대의제 민주주의를 거부하거나 파괴하려는 세력으로는 전체주의 체제나 독재체제를 수립하려는 극우세력과 공산주의 체제를 수립하려는 극좌세력이 존재한다. 그들은 평상시에는 극단적 대립을 보이다가도 사회가 혼란스럽거나 대의제 민주주의에 허점이 보이면 체제 전복세력으로서 공통점을 드러낸다.
만일, 정치 이념에 따라 그 계보나 성격을 이상과 같이 네 부류로, 즉 민주주의 제도의 발달과 보존을 추구하는 온건한 보수주의자와 온건한 진보세력 그리고 민주주의 제도의 전복과 부정을 시도하는 극우세력과 극좌세력으로 분류한다면 조선일보는 어느 쪽에 가까울까.
조선일보는 당연히 자신들을 정통 보수주의자로 분류하고 싶어 할 것이다. 자신들이야말로 보수주의의 중심세력이며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자처하고 나설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러할까? 조선일보는 혹시라도 자유민주주의를 단순히 반공 이데올로기 정도로 이해하고 그러한 주장을 펼치는 것은 아닐까. 반공 이데올로기로 친다면 극우세력만큼 충실한 신봉자도 없는데 조선일보는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자신들이 극우세력과 다르다는 논리적 증거를 자신 있게 제시할 수 있을까.
조선일보가 합리적 보수주의 언론기관임을 자처하려면 서구의 보수주의자들처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원리에 보다 충실해야 한다. 조선일보가 진정으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면 그들은 20년 전 혹은 30년 전 군부독재시대에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 좀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조선일보의 역사는 이것과 정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군부세력의 권력 장악을 부추기고, 유신체제와 전두환 체제를 지지하며, 서구식 민주주의를 무분별한 수입품이라고 폄하한 대신 체육관 선거와 군사문화로 대변되는 소위 ‘한국적 민주주의’를 예찬했다면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가 아니라 파시즘 체제의 신봉자이다. 합리적 진보주의자와의 공존마저 거부하는 상투적 색깔공세에 길들여졌다면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가 아니라 오히려 파괴자로 분류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여 조선일보는 합리적 보수주의 언론기관으로 분류하기에는 너무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조선일보는 민주화운동 이야기가 나오면 이승만 정권 당시 조선일보가 반독재투쟁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설령 조선일보의 그런 주장 중 일부가 사실이라고 치더라도 지난 수십 년 동안 조선일보가 저지른 잘못이 면죄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조선일보가 민주화에 기여한 시기와 비중은 군사 독재정권에 빌붙어 반민주적 행위를 해온 것과 비교할 때 너무나 짧고 약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권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것을 고유업무로 삼는 언론기관이 과거 한 때 권력을 비판하는 기능을 담당했다고 해서 그것을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며 다른 시기의 반언론적․반민주적 행태에 대한 책임을 면하려는 태도는 온당치 못하다.
지난날의 명백한 반민주적․반역사적 행위에 대하여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은폐하고 잘못을 반복하는 경우 잘못은 다시 반복될 수밖에 없다. 오늘의 조선일보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오늘날 조선일보는 20년 전, 혹은 3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반민주적 모습을 답습하고 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지난 수십 년 동안 민주화 세력들이 힘들여 가꾸고 쟁취해 준 언론의 자유를 오히려 민주화 세력들을 공격하는 무기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색깔공세는 조선일보가 민주화 세력들을 공격하기 위해 동원하는 상투적 수법이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방법이 조금 세련되었을 수는 있지만 본질은 하나도 변한 것 같지 않다. 한마디로 말하여 조선일보의 폐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조선일보가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신문인지, 아니면 극우주의적 신문에 가까운 것인지 엄중한 감시와 검증 작업에 착수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강준만 교수의 주장처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조선일보의 정체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강준만 2000, 4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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