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무한순환’ 이번엔 고리 끊나?
#장면 1
남·북이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채택한 지 이틀 뒤인 1992년 1월22일 뉴욕에서 김용순 북한 노동당 대외담당 비서와 아놀드 캔터 미국 국무차관 사이에 사상 첫 북미 고위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 비서는 미군주둔까지 용인하는 관계정상화 방안까지 내놨다. 그러나 이미 캔터 차관에게는 ‘정상화’라는 말을 쓰지 말라는 훈령이 내려져 있었다.
#장면 2
2005년 9월20일 미 재무부는 방코델타아시아(BDA)를 북한의 ‘우선적 돈세탁 우려대상’으로 지목해, 북한 계좌를 동결했다. 북핵문제를 해결한다는 6자회담의 9·19공동성명이 나온지 하룻 만의 일이다.
미, 결정적 고비마다 ‘협상-무시’ 되풀이
북, 체제 붕괴 노림수 맞서 핵카드 고집
언어학에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란 개념이 있다. 시니피앙은 소리, 시니피에는 의미를 뜻한다. 이 둘이 서로 어울려야 소통이 가능하다. 북한에게 시니피앙은 핵개발이고, 시니피에는 북미관계 정상화, 즉 생존보장이다. 하지만 북-미간엔 이 둘이 따로 노는 데 문제의 원인이 있다. 미국은 북핵 위기를 둘러싼 몇 차례 합의에서 핵 폐기만 강조하고, 북-미 적대관계 해소에는 냉담했다. 의미가 전달되지 않으면 소리는 커지게 마련이다. 북핵을 둘러싼 북-미간의 변주곡처럼.
비핵화선언 뒤 뉴욕의 푸대접=1989년 미국 인공위성은 북한 영변 핵시설의 원자로가 가동을 중단하고 연료봉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할 가능성을 탐지했다. 핵 사찰을 놓고 한창 알력이 벌어지던 1991년 8월18일 보수파 쿠데타가 무산되면서 거대제국 소련이 무너졌다. 이에 아버지 조지 부시 미 행정부는 핵무기의 존재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않는 엔시엔디(NCND)정책을 처음으로 깨고, 9월27일 소련을 겨냥했던 한반도의 전술핵무기 철수를 발표했다. 이와 함께 70년대부터 거론돼온 4대국에 의한 남북한 교차승인 방안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나타났다. 유엔에 남한과 동시가입한 북한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제공을 용인하며 비핵화선언에 합의했다. 1년 전 소련과 공식수교하고 중국과 무역대표부를 교환한 한국에 발맞추어 자신들도 미국·일본과 관계를 정상화하길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틀 뒤 북한은 뉴욕에서 싸늘한 푸대접을 받았다. 이후 핵시설 특별사찰 논란만 커진 가운데 한-미는 93년 1월 북한의 침략에 대비한 작전계획 5027의 연습인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를 발표했다. 북한은 3월8일 준전시상태를 선포하며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북한붕괴론에 기댄 제네바합의=핵사찰을 둘러싸고 94년 6월 전쟁 직전까지 갔던 북-미는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의 방북과 제네바 합의로 돌파구를 찾았다. 하지만 제네바합의 당시 미 고위관리들은 경수로 지원 등 제네바합의를 이행할 즈음이면 김정일 정권이 붕괴할 것이라고 보고 합의 이행에 소극적으로 나왔다. 지난 26일 기밀해제된 중앙정보국(CIA)의 보고서를 보면, CIA는 협상 도중 전문가 회의를 소집해 “돌이킬 수 없는 경제악화로 인한 정치적 내파는 가장 가능성 있는 북한의 종말이 될 것”이라며 “5년 안에 붕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제네바합의는 3주 뒤인 11월 초 미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40년 만에 다수당으로 등극하면서 사실상 사문화됐다. 빌 클린턴 행정부는 대북 경제제재 해제를 미뤘고, 중유공급 일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금창리 지하핵시설 의혹도 불거졌다. 98년 8월3일 북한은 장거리 미사일 능력을 과시하는 광명성1호 인공위성을 발사했다. 다시 위기가 고조됐다.
부시가 걷어찬 북미수교=98년 11월 대북조정관으로 임명된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이 다음 해 5월 북한을 방문했다. 금창리를 단순한 동굴로 판정한 페리는 그해 9월 포괄적 대북접근책을 담은 페리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이후 2000년 6월15일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조명록 북한인민군 차수의 방미와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역사적인 방북이 이뤄졌다.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통한 북미수교 합의라는 거대 이벤트가 눈앞에 다가왔다. 하지만 격화하는 중동정세에 빠져 있던 클린턴 대통령은 차기 행정부의 발목을 잡지 말라는 공화당 쪽의 비판에 끝내 방북을 취소했다. 북-미 관계 개선 약속이 3번째로 깨지는 순간이었다.
금융제재 속의 9·19 공동성명=조지 부시(아들) 행정부 등장 뒤 첫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2001년 3월6일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새 행정부는 북한을 포용하고 전임 클린턴 대통령의 정책을 계승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워싱턴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 경악했다. 부시 대통령은 ‘김정일이 북한 주민도 못 먹이는 주제에 핵무기를 개발한다’고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최근 발간된 파월의 전기 <군인. 콜린 파월의 생애>은 “미국의 대화는 북한 정권의 붕괴여야 한다”(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6자회담은 북한에 협상 불가능한 요구를 개진하는 자리”(딕 체니 부통령)라는 당시 부시 행정부의 공격적인 대북인식을 생생하게 전한다.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국무차관보의 방북 때 북한이 시인한 우라늄 농축 핵개발로 재증폭된 위기는 2005년 2월10일 북한의 6자회담 참가로 돌파구가 열렸다. 그러나 한 달 뒤 미국은 ‘북한이 미 달러화 위조인쇄에 필요한 인쇄물자 확보를 계속하고 있다’고 관련국에 경고하고 나선다.(10월25일 발표된 미 재무성의 보고서). 미국은 위폐 관련조처는 정당한 법집행으로 정치문제가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마이클 그린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담당국장은 최근 <뉴스위크>와 인터뷰에서 부시가 6자회담의 9·19성명 때 북한의 불법자금 차단 계획을 직접 승인했다고 밝혔다. 이후 북한은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을 강행했다. 최근 임기를 마친 한성렬 유엔주재 북한대사는 미국 친구들에게 “도대체 어떻게 해야 미국이 다시 우리와 대화하겠는가”라고 애처롭게 작별인사를 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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