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40년 4월 9일 저녁 7시 30분, 윈스턴 처칠은 공군장관 사무엘 호레의 집에서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처칠은 노르웨이의 수로를 봉쇄해 독일의 철광석 수입 루트를 차단하게 될 것이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3시간 뒤인 그날 밤 10시 30분, 해군본부로 돌아간 처칠은 독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히틀러가 선제공격을 감행, 노르웨이 나르빅항을 점령한 것이었다.
신속하게 공격을 감행한 히틀러는 하지만 공격 직후 상황을 잘못 판단하고 말았다. 육군 원수 카이텔을 불러 중립국인 스웨덴으로 병력을 철수하란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는 역공 당할 위기를 스스로 초래하는 중대한 오판이었다. 이 상황에서 “No”라고 말한 사람은 베른하르트 폰 로스베르크라는 일개 중령이었다. 그는 나르빅 사령관에게 전달되는 히틀러의 전보 내용을 들고, 즉시 카이텔 원수를 찾아가 “총통의 전보를 보내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원수는 총통의 명령을 거부할 위치에 있지 못했다. 하지만 그 역시 총통의 판단이 잘못됐다는 지적에 공감하고 있었다. 원수는 고민 끝에 명령의 주요 내용을 빼고 “진급을 축하한다”는 형식적 메시지만 담아 나르빅 사령관에게 전했다. 진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령관은 이 메시지에 따라 노르웨이 수로를 봉쇄, 독일군의 숨통을 틔워놓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된다.
#2.
전차 전문가로 유명한 독일의 구데리안 장군은 1940년 5월 ‘낫질작전(sickle-cut plan)’이란 유명한 작전을 감행했다. 탱크로 지나가기 어렵다고 여겨졌던 아르헨 산맥을 장갑차를 동원해 돌파, 연합군을 두 동강 내버린 것이다. 프랑스의 유명한 ‘마지노선’을 무기력하게 만든 이 작전은 “예상치 못한 진로로 낫질하듯 연합군을 싹둑 잘랐다”해서 ‘낫질작전’이란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히틀러는 중대한 오판을 했다. 선발부대의 측면이 공격받을까 두려워 대기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 결과 전에 없던 일대 장사진이 펼쳐졌다. 무려 150만명의 병사들과 1500대의 기갑차량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장장 306km에 걸쳐 이어진 채 그대로 멈춰 선 것이었다. 구데리안은 초조했다. 이렇게 시간을 끌다간 언제 연합군이 세력을 정비해 반격을 가해올 지 모를 위기상황이었다. 그는 중대 결단을 내렸다. 총통의 명령에 “No”라고 답한 것이다.
구데리안은 히틀러의 명령을 무시하고 진격을 감행했다. 역사는 이 날을 “영국 400년 전쟁사 중 최악의 날”로 기록하고 있다. 구데리안의 ‘낫질작전’으로 영국은 무려 25만의 병력을 잃은 것이었다.
#3.
의문은 여기서 발생한다. 명령은 내린 사람은 다름아닌 총통. 그는 신에 버금가는 카리스마를 휘둘렀던 무소불위의 ‘절대자’였다. 히틀러의 후계자로 지목됐던 괴링은 “그가 나에게 ‘여자’라고 말한다면, 그 순간부터 나는 여자다”라는 말로 히틀러의 절대성을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 독일 분위기에서 ‘절대자’의 명령에 “No”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이 궁금증에 대한 답은 ‘임무형 전술(Auftragstaktik)’이다. 임무형 전술이란 지휘관의 역할을 ‘목표제시’로 국한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술은 전적으로 실무자에게 맡기는 독일군의 기본수칙을 말한다. 이 전술의 기반은 절대적인 상호 신뢰다. 독일군은 장교 하사관 병사들을 믿고 전폭적인 자유를 부여해 줌으로써 적응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었고, 인격과 존엄성을 존중해 줌으로써 최고의 전투력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로스베르크 중령과 구데리안 장군의 명령 불복종은 임무형 전술의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독일군은 상부의 명령이 적절치 못하다고 판단될 땐 과감하게 “No”라고 말할 수 있는 통로를 제도적으로 마련해 놓았고, 현장의 의견을 적극 수용했으며, 이견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 구데리안은 ‘명령 불복종’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장으로 승진했다.
#4.
독일이 항복한 1945년, 미국을 비롯한 점령국은 ‘병력과 화력에서 열세였던 독일군이 왜 그렇게 막강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연합국은 ‘독일엔 장교와 하사관 그리고 사병 관리를 위한 과학적 모델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게 된다. 독일군은 장교를 선발할 때 미국처럼 A~F로 분류하지 않았다. 이를 바탕으로 보직을 임명하거나 진급을 결정하지도 않았다. “책임감, 열정, 두뇌, 탐구심, 인격 등을 수치로 구분할 수는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독일이 주력한 것은 병사들의 사기였다. 독일은 군인들의 자긍심과 사명감을 한껏 높이기 위해 최고의 대우와 예우를 갖춰 줬다. 연합국은 신뢰와 자율과 사기가 빚어낸 막강한 파워에 주목하고, 이를 현실에 응용했다. 임무형 전술은 현재 나토(NATO)의 공식 독트린으로 채택돼 있다. 임무형 전술의 장점은 경영학에도 도입됐다. 조직관리와 리더십의 기본으로 알려진 ‘권한 부여’가 그것이다.
독일의 사례에서 나타난 것처럼, 한 사람의 No-man은 조직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조직의 공식 명령 앞에 “No”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권위가 강한 조직일수록 “No”라고 답하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2006-08-23 <조선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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