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일지도 모릅니다.
역사를 가만히 살펴보면 몇 가지 흐름이라는 게 있는 듯합니다. 먼저 지배 계층이 소수에서 다수로 변화했습니다. 왕가 중심의 역사는 귀족 중심으로, 부르주아 중심으로, 다수의 시민이 투표권을 지니는 단계로 변화했습니다.
이보다 더욱 중요할 수 있는 사실은, 역사 공동체의 범위가 계속 확대되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고대 중국의 은상은 산동성 중심의 지역정권이었습니다. 그 다음 주나라는 약간 더 넓은 지역에서 지역정권들 간의 주도권을 쥔 종주국가로 활약했습니다. 그리고 진나라는 각 지역정권들을 완전히 통합해 현재 중국 판도의 기초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한나라, 진나라, 수, 당, 송, 명, 청... 모두 점점 넓은 지역을 통합해갔습니다. 유럽 쪽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의 길은 모두 로마로 통한다지만 로마 제국의 권역은 암흑기라는 중세의 세계보다 좁습니다. 주도권이 로마 한 군데에 집중되어있다 뿐이지 실제 역사공동체는 암흑기 유럽이 더 넓었습니다. 근대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제국주의 시대였으니까요.
2차대전 이후 제국의 식민지들은 독립하여 과거처럼 직접적인 원료조달지 역할을 수행하진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구의 남부는 점점 헐벗어지고 북부는 점점 부유해지는 남북문제에서 알 수 있듯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이미 이러한 기초가 완성된 상황에서 세계화는 피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중국 고대, 전국시대에는 연, 제, 한, 조, 위, 초, 진의 일곱 나라가 있었습니다. 이 나라가 하나의 천하로 묶이는 것은 역사 발전의 필연적 흐름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흐름의 중심을 가장 강력한 '진'이 담당한 것 역시 당연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연, 제, 한, 진, 조, 위, 초의 귀족과 백성은 모두 진에 대항했습니다. 역사의 흐름보단 현실이 중요했기 때문이겠죠.
먼저 FTA가 뭔지 생각해봅시다. FTA는 관세 철폐를 통해 두 개의 다른 지역을 하나의 시장으로 묶는 약속이죠. 옛날에는 정치/경제/종교/문화가 하나로 어우러져 있었지만 지금은 분리되었죠. 옛날에는 하나의 정치/경제/종교/문화 집단과 다른 정치/경제/종교/문화 집단 사이의 충돌을 전쟁이라고 불렀지만, 현대에는 정치와 정치, 경제와 경제, 종교와 종교, 문화와 문화가 분리되어 전쟁을 벌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경제전쟁 아닐까 합니다. '무역전쟁'이라는 표현처럼, 경제의 충돌은 정말 전쟁과 다름없습니다.
언젠가는 FTA를 피할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무역전쟁의 교전 당사국이라면 무조건 전쟁을 끝내려고 하진 않을 겁니다. 이기려고 하는 게 당연할 것입니다. 무조건 FTA를 용인한다는 것은 백기투항에 다름 아닙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두 국가 간의 약속인 만큼 우리에게 불리한 부분이 있으면 그만큼 유리한 부분도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고대 중국, 전국시대의 최강자는 진나라였습니다. 외교 관계로 전국의 흐름을 잡아보려던 두 유파가 있었습니다. 소진파와 장의파였습니다. 소진은 진에 대항해 연+초+제+한+진+조의 연합전선을 구축했습니다. 이 연합전선 때문에 진의 천하 장악은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진나라가 장의를 기용하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장의는 진과 다른 나라 간의 개별적 동맹(진-연, 진-초, 진-제, 진-한, 진-조) 관계를 수립합니다. 동맹 조건은 같습니다. 너희만은 공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결국 모든 동맹은 깨집니다. 패권국가와 1:1의 규약을 맺은 건 아주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패권국가의 정의가 뭘까요? 전 이렇게 내리겠습니다. 패권국가란, '1:1 상황에선 언제든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약속을 깰 수 있는 국가'라고 말입니다. 전국의 육국은 하나씩 하나씩 진에 통합되었습니다.
FTA가 딱 그렇습니다. PD수첩에 나온 것처럼 미국과 캐나다는 FTA를 맺었습니다. 미국에 유리한 부분에서라면 관세는 철저히 지켜집니다. 하지만 목재 무역은 캐나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합니다. 미국은 캐나다 목재에 계속 관세를 물렸고, 현재 세율을 협의하는 또다른 약정이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1:1 상황에서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약속을 파기하는 바로 그 모습이죠.
파란 잉크와 빨간 잉크를 섞으면 무슨 색이 될까요? 보라색? 아닙니다. 그 색깔은 잉크의 양을 확인한 후에야 알 수 있는 겁니다. 1리터의 파란 잉크에 0.001리터의 빨간 잉크를 섞어서 나오는 건 파란 잉크입니다. 한국과 미국의 무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산품 중심의 무역에선 무역수지가 엇비슷하게 나올지 몰라도 서비스업과 의약, 농산품, 교육 등을 규제없이 붙여놓으면 우리가 먹힐 뿐입니다.
스크린쿼터 축소를 찬성하고 묵인하셨던 분들은 영화배우가 수입차를 타고 어쩌고 하는 부분을 말합니다. 그들이 벤츠를 타건 볼보를 타건 무슨 상관입니까? 그건 질투에 불과합니다. 스크린쿼터가 축소되고 폐지될 수 있는 조건은, 한국 사람이 한국 영화를 많이 보는 게 아닙니다. 한국 사람이 미국 영화를 보는만큼 미국 사람도 한국 영화를 봐야하는 겁니다. 한국 영화에 그렇게 자신감이 없느냐는 얼빠진 이야기를 한 분이 계시죠. 그럼 이렇게 물읍시다. 한국 사람이 슈퍼맨이나 엑스맨을 보는 만큼 미국 사람이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를 볼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냐고 말이죠.
1:1 규약인 FTA는 미친짓입니다. 1차 협상에서 기본적으로 합의한 11조는, 기업이 국가를 국제법정에 제소할 수 있게 합니다. '국제'가 '국제'였던 적이 있습니까? UN이 전지구적 공익을 실현하는 경찰 역할을 합니까? 헤이그의 '국제전범재판소'가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를 침공한 부시를 처벌합니까? '국제'는 꿈의 표현일 뿐입니다. 국가와 기업의 분쟁을 조정한다는 국제법정은, 미국의 이익만을 대변할 겁니다. FTA는 조폭 보스와 담배가게 아저씨가 모든 수입을 반씩 나누자는 약속입니다.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으면 조직의 회계사가 분쟁을 조정해준다는 겁니다. 담배가게 아저씨는 지금 온 가족이 만류하는데 조폭과 약속을 맺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말합니다. 앞으로 아빠 월급이 두 배로 뛸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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