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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지명자의 삶과 사랑
시사종교 > 상세보기 | 2006-03-25 12:52:45
추천수 0
조회수   2,501

제목

총리지명자의 삶과 사랑

글쓴이

박용찬 [가입일자 : 2000-04-22]
내용
Related Link: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

그냥 여성운동가로만 생각했는데... 미안한 마음이 드네요.

그리고 기대가 많이 많이 됩니다^^



오마이뉴스펌입니다 (전문과 사진은 링크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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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 의원은 자신의 인생행로를 뒤바꾼 결정적 사건으로 부군인 박성준(성공회대 겸임교수·신학박사)씨와의 만남과 크리스찬아카데미와의 만남을 꼽는다.



한 의원은 1967년 대학 연합서클 선배인 박성준씨와 4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했지만 그 이듬해 남편이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되는 바람에 신혼의 단꿈을 6개월만에 접어야 했다. 그 이후 한 의원은 81년 성탄절 특사로 남편이 풀려나기까지 13년 동안 여성운동계의 '전설'처럼 내려오는 애틋한 사랑을 나누었다.



당시 교도소 철창에 갇힌 남편과 담장 밖의 아내를 잇는 유일한 창구는 일주일에 한번씩 교신하는 옥중서신이었다. 그는 그 시절 자신의 모습을 '남편의 편지를 먹고 사는 새댁'으로 회고했다.



"나는 남편이 대전교도소에 수감되던 그날부터 출옥하는 그날까지 (교도소 규정에 따라) 단 한 번의 어김도 없이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쓰고, 한 달에 한 번씩 면회를 갔다. 남편 역시 일주일에 한 번씩 붙여오는 답장을 단 한 차례도 빠트리지 않았다. 비록 교도소의 검열을 거쳐 서로의 생각을 온전하게 전달할 순 없었지만, 남편과 나의 옥중서신은 13년 동안 서로의 이상과 사랑을 오롯하게 확인할 수 있는 창구였다.



우리의 편지는 남편과 나를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통로였으며 사랑을 확인시켜주는 강한 끈이었다. 우리의 못다한 사랑과 시대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분노와 희망이 온전하게 편지에 실려 있었다. 우린 편지만으로도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었으며 서로에 대한 믿음과 철학까지 공유할 수 있었다. 나는 남편의 편지를 먹고 사는 새댁이었다. 그리고 점점 더 강하고 맹렬한 투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1974년부터 6년 동안 한국 여성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진행된 여성 중간집단 교육과정의 간사역할을 했다. 여성 중간집단 교육은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의식화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외국에서는 '여성해방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시기였다.



지난 30년 동안의 한국 여성운동사에서 가장 큰 변화로 간주되는 가족법 개정도 1975년 1월 당시 아카데미 하우스에 모인 각계각층 인사 100명이 1박 2일 동안 여성문제 토론회를 하면서 '가족법부터 바꾸자'는 주장을 제기한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그때 한명숙 간사와 함께 활동했던 여성활동가들이 신인령 이화여대 총장과 장필화 이화여대 교수 등이다.



그러나 박정희 독재정권의 중앙정보부는 1979년 4월 16일 김세균·신인령·이우재·장상환·한명숙·황한식 등 크리스찬아카데미 간사 6명과 정창렬 한양대 교수를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불법 지하용공써클을 구성해 크리스찬 아카데미에 입교하는 농민·근로자·여성·청년·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중간집단이론 강의를 통해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등 헌법질서를 부정하고 이를 변혁함으로써 사회주의의 실현을 획책했다는 혐의였다.



이들은 사회주의 서적을 소지하고 있다는 혐의로 전원 징역 1년6개월부터 7년형을 선고받았다. 한명숙 또한 남편 박성준이 대전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동안에 광주교도소에서 2년6개월을 수감돼 있었다.



수감되기 전에 이들에게는 '남녀 차별없이' 가혹한 고문이 자행되었다. 그 또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온 몸이 꽁꽁 묶인 채 밤새도록 구타를 당했다. 그 시절 그는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밤과 낮을 구별할 수 없었고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온 몸은 피멍이 들어 부어올랐고 부은 피부는 스치기만 해도 면도날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주었다. … 태어나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고문의 고통보다 더 크게 나를 짓눌렀다. 그들이 나에게 요구한 것은 단 하나였다. '빨갱이'임을 실토하라는 것이었다."



그를 죽음의 언저리에서 건져준 것은 여동생 한이숙이 넣어준 한 권의 책이었다. 그 책은 나찌정권에 저항하다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수감중에 종전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서 총살을 당한 독일의 실천적인 신학자 디트리히 본훼퍼의 옥중서간집이었다. 그는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본훼퍼의 이 대목을 다시 읽곤 했다.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 내가 매 맞는 것, 내가 죽은 것, 이것이 그리 심한 고통은 아니다. 나를 참으로 괴롭게 하는 것은, 내가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동안 밖이 너무 조용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조용한 가운데서도 세월은 흘렀다. 두 사람은 1981년 각각 광복절 특사와 성탄절 특사로 풀려났다.



단란했던 신혼의 꿈이 13년 동안 정지된 탓일까. '맹렬한 투사'라는 표현과 달리 한명숙 의원은 애틋한 그 시절 편지에 쓰던 표현대로 지금도 이따금 남편을 '준'이라고 부르는 '닭살 부부'다. 한명숙에게 남편 박성준은 이미 오래전부터 '준사마'였던 셈이다. '신랑' 박성준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또한 아내 한명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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