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50년대 널리 쓰이던 진공관은 트랜지스터가 그 역할을 대신하여 오래전에 사라져 버렸어야 하는 증폭 소자이다. 하였지만 오디오에서는 부활을 넘어서 오히려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사실 나는 진공관에는 관심이 없다. 물론 대학교 때 이연구소에서 나온 프리앰프 키트인 SL5T를 조립하여 사용한 적이 있었지만 그 후로는 진공관을 쓴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최근 우연한 기회로 레벤이라는 진공관 앰프를 들이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지인이 쓰는 케인이라는 중국제 독일 브랜드 진공관 KT88 앰프가 있었다. 이것을 처분하게 되었는데 일제 트라이오드로 바꿀 예정이었다. 그런데 가게 주인은 레벤을 권하는 것이었다. 레벤이란 기기는 오래전 여러 번 본 적이 있었지만 내게는 촌스러운 모양새 탓에 들어 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관심 밖의 기기였다. 주인의 권유에 의해 들어 보니 다른 진공관 하고는 차원을 달리하는 소리가 났고 무엇에 홀린 듯 내가 시세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레벤 300XS를 덥석 들고 오게 된다.
KEF 105/3에 레벤을 물려 본다. 소리가 아주 근사하다. 출력은 불과 15W이지만 8인치 우퍼가 두 발 장착된 비교적 대형기에 속하는 105/3는 쉽게 울려 버린다.(105/3이 4옴이라 레벤 셀렉터로 4옴에 맞추어야 소리가 좋다) 진공관 특유의 두툼한 질감이 아주 매력적이고 특히 타 진공관과 달리 고역의 투명함도 아주 좋았다.
그래서 레벤이라는 앰프에 대해 알아보니 럭스만 출신의 타쿠 효도라는 사람이 1992년 만든 진공관 앰프 전문 브랜드로 레벤은 독일어로 생명을 의미한다. 레벤은 사장 효도 자신을 비롯하여 숙련된 아주머니들이 한 달에 30대 정도만을 생산하는 소규모 회사인데 대표 모델인 CS600이 권위 있는 스테레오 파일지에 연속 6년(2010~18년) A 클래스에 오르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효도라는 창업자인데 그는 싸구려 장사꾼이 아닌 진정한 장인으로 중학교 때부터 진공관 앰프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무려 50년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자그마한 작업실에 이루어진 것이고 결코 버릴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라는 것이다. 이런 감성을 가진 이가 만든 앰프는 좋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많은 진공관 앰프 제작자들이 있지만 정작 감성적인 물건을 만드는 이는 없다. 한 번은 모 앰프 제작자 스스로가 외국 유명 앰프 디자인을 베끼기나 하고 또 걸그룹 음악을 듣는 것을 보고는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레벤은 우리나라에 2000년대 초부터 소개되기 시작하였고 나는 몰랐지만 큰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말하자면 한참을 지나 그 진가를 이제야 알아본 셈이다. 정말로 치명적 매력의 묘한 감성을 간직한 진공관 앰프의 명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중고로 구입한 것은 2003년부터 나온 CS300XS이다. 관은 EL84 출력관으로 모델은 300으로 시작하여 300X, 300XS로 변경되었다. 중요한 것은 관의 차이인데 소보텍 관으로 시작하여 300X부터는 멀라드 관을 채용한다. 2006년에는 300X 한정판이 나오게 되는데 이 기종은 어렵게 찾아낸 1950년대 생산된 재고 멀라드 구관 EL84 출력관과 미국의 GE 5-star 5751 초단관을 채용한 것으로 관의 한정된 수량으로 인해 200대 한정판으로 나오게 된다. 참고로 5751은 12AX7보다 게인이 20% 낮고 두툼한 음색이 특징이다. 그리고 다시 300XS는 이런 관을 다시는 구할 수 없기에 소보텍을 채용 S가 붙게 된 것이다. 물론 앰프의 구조는 동일하고 관만 다르다.
진공관 앰프를 하게 되면 가장 큰 문제가 바로 관이다. 장의사는 아니지만. 특히 구관이 소리가 좋아 부르는 게 값이라 배보다 배꼽이 큰 경우가 허다하다. 그냥 출고 당시 관을 들으면 되지만 그 유혹에 초연한 애호가가 과연 몇이냐 될까 싶다. 관을 바꾸면 소리가 좋아지겠지란 막연한 기대감에 부풀지 않을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나도 앰프를 사자마자 장터에 텔레풍켄보다 낫다는 텔람(TELAM) EL84를 샀는데 끼고는 바로 반 값에 팔아버린 적이 있었다. 그후 절대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 했고 한 동안은 잘 버텼다. 그런데 우연히 TR 인티앰프의 인기품인 아큐페이즈가 들어오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예전에 쓰던 구형 아큐 인티 211에 대한 좋은 인상이 남아 비교적 최근 기종인 E-360을 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역시 음색은 진공관인 레벤이라 이 놈을 팔려고 보니 용산 가게에 이보다 신형이 370을 470을 부르는 것이었다. 일본 가격으로는 2만 앤 차이만 나는데 국내에서는 무려 170이나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360을 400에 내놓았다. 하지만 아무도 연락이 없었다. 조회수만 무려 수천 건이지만. 그래서 가격을 내려 내려 결국 산 가격인 350에 내놓았지만 아무도 연락이 없다. 그래서 그냥 쓰기로 하고는 레벤을 치우고 아큐를 연결하였다. 또 들어 보니 음색만 옅을 뿐 TR 대출력이 주는 넉넉함과 아큐 특유의 생동감이 아주 좋았다. 더불어 리모컨도 지원되니 편했다. 레벤을 팔아야겠군! 하고는 레벤을 주고 산 가격에서 30을 손해 보고 210에 올렸지만 이것은 아무 연락이 없었다. 레벤인데? 그것도 600이 아닌 인기품 300인데 정말 이상했다. EL34의 600로 들어 봤지만 내겐 300의 EL84 음색이 더 맘에 들었다.
아큐는 정식 수입이 아니라서 뒷면의 100V 콘센트와 전원선이 연결되어 있다. 왜 콘센트를 설치하는지 정말 이해 불가로 여기에 다른 기기를 쓰면 결코 소리에 좋을 턱이 없는데 최신형 C-2850 역시 콘센트가 그대로 존재한다. 오히려 정식 수입품에는 이 콘센트가 삭제되어 들어온다. 하지만 내 360이 220V 스티커가 붙어 있어 정식 수입품인 줄 알았지만 수입상에 문의 결과 아니란다. 스티커는 뭐지? 상가에 물어보니 "그 스티커 저희 집에도 많이 있습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 헐~
아큐는 인렛 단자에서 전원이 들어 오먼 라이브가 전면의 스위치로 연결되고 내추럴이 콘센트를 거쳐 내부 트랜스로 공급된다. 그래서 콘센트를 거치지 않고 인렛에서 트랜스로 직접 배선 납땜을 하였다. 소리의 선도가 금방 좋아졌다. 그리고 휴즈도 하이파이튜닝으로 교체하여 듣기로 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 갑자기 춘천에서 아큐를 사러 오겠다고 한다. 하이텔 시절부터 나를 안다고 하면서. 그래서 갑자기 아큐가 방출되었고 다시 레벤을 듣게 된다. 또 들으니 레벤이 좋게 들린다. 사람의 마음이 참 그렇다.
이제는 다시 레벤에 마음을 붙일 차례가 된다. 하이파이튜닝 휴즈는 진작에 바꿨고 핑계가 생겼으니 관을 바꿀 기회다. 어떤 이가 레벤 300X 한정판을 중고로 내놓았는데 원관인 멀라드는 온데간데없고 필립스 미니와트와 제나렉스(GE) 두 조, 푸스반느까지 초단까지 덤으로 준다고 했다. 가격은 210. 사자, 미니와트가 있으니 그런데 지방이란다. 기다렸다. 다른 이에게 판매되고 말았다.
나도 관을 바꾸자, 텐프로 사운드를 찾아 간다. "오디오는 구라로 시작해 구라로 끝난다"라고 외치는 그 유명한 가게다. 역시 이 소리를 또 한다. 이제는 한술 더 떠 진공관 앰프가 진공관을 바꿔 소리가 달라지면 엉터리다라고 외친다. 그래도 졸라서 진공관을 소개받는다. 출력관은 EL84 일렉트로 하모니 초단은 테슬라 803S으로, 가격도 저렴하다. 얼른 집에 와 끼워본다. 아무리들어도 원관이 소보텍이 좋다. 다시 찾아 가니 친절하게도 일렉트로 하모니를 테슬라로 바꾸어 준다. 그래도 소리는 역시 원관이 좋다. 텐프로 말이 맞아 내가 어리석었어! 다 부질없어~
하지만 이번에는 한정판에 있던 관을 찾아본다. 멀라드 EL 84 구관은 구하기 힘든 것이라 복각관으로 그리고 초단 GE 5751 5-star는 5-star는 아니지만 다행히 구관이 있었다. 당장 구입해 끼워 본다. 구식의 소리가 난다. 그런데 답답한 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원관이라면 훨씬 좋은 소리가 예상이 되었다. 300X는 현재로서는 구하기 힘든 한정판이 된 셈이다. 그래서 레벤에서는 S가 붙여 출력관과 초단 모두 소보텍을 끼워 팔게 된 사연이다. 소보텍은 타쿠 효도의 선택이었는데 결코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장점이 많은 관이 소보텍이니.
아무리 들어 보아도 답답하여 관을 몽땅 처분하기로 한다. 또 복각이 쓰레기라는 소문도 있고. 가격을 낮추니 멀라드 EL 84는 바로 나갔지만 GE 5751는 나가지 않았다. 5751은 그냥 쓰기로 한다. 레벤도 전원선 교체의 필살기가 필요해 보인다. 내부를 살펴본다. 220V용 트랜스에 가느다란 AWG22의 선재가 사용되는데 상표를 보니 "million"이라 적혀 있다. 찾아보니 1974년 만들어진 인도? 회사다. 이 선재는 전원부에 쓰이고 나머지 선재는 히다치 선이다. 혹시 일부러 전원부에만 쓴 이유가 있을 것 같았지만 과감히 네오텍 순은단결정(미터당 33만 원)으로 바꾸어 본다. 네오텍은 AWG14로 훨씬 두껍다. 내추럴은 전원 스위치에 연결되어 있어 인렛과 트랜스 사이에 라이브 선 5cm 정도만을 교체하였다. 소리가 쏟아진다. 그런데 진공관의 맛이 사라지는 것 같아 다시 밀리언으로 바꾸어 본다. 하지만 아니었다. 네오텍의 변화가 너무 커 마치 예전이 소리가 좋은 것처럼 들렸던 것이다. 다시 네오텍을 연결한다. 납은 오야이데 4% 은납을 사용하였다. 다시 들어 보니 완전히 다른 앰프처럼 들린다. 불과 5cm의 선재로 인한 소리의 변화가 너무도 컸다. 네오텍으로의 전원선 교체는 이미 럭스만과 아큐 씨디피, 패스 파워, 마크 프리까지 모두 교체한 바 있는 나만의 필살기다.
결국 초단만 GE 5751로 교체하고 네오텍 순은 단결정 전원선 교체로 듣기로 한다. 그래도 미련이 남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명관 텔레풍켄 12AX7이었다. 이 관은 이미 6년 전인 2015년 캘리포니아랩 컨버터에 쓰려고 외국에서 한 알만 구입한 적이 있는데 멍청한 소리로만 기억되어 잘 모셔두고 있다. 당시 진공관에 대한 지식이 없어 열이 식기 전 손으로 만져 글자가 모두 지워져 팔 수도 없는 것이다. 현재 텔레풍켄 12AX7는 복각관이 나오고 있는데 페어에 무려 36만 원이나 하여 오히려 원관이 싸서 미련 없이 구관(1961년 베를린 생산)을 페어 매칭으로 25만 원에 구입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5751을 빼고 12AX7을 끼워 본다. 텔레풍켄의 명성대로 고역의 명징함이 참 좋았고 저음도 깊고 전체적으로 편안한 소리였다. 역시 명관다웠다. 다소 현대적이라 할 수 있는. 그렇다면 옛날에 산 텔레풍켄은 왜 멍청했지?
캘리포니아랩 컨버터는 이름 모를 관이라 텔레풍켄으로 교체하였고 소리가 멍해 다시 테슬라 롱 플레이트인 ECC803S로 교체하여 잘 쓰고 있었던 것이다. 글자가 지워진 텔레풍켄을 다시 꺼내어 컨버터에 끼워본다. 어라 소리가 좋은데? 그런데 예전에는 왜 멍청하게만 들렸지, 아마도 앰프에 끼워진 텔레풍켄과 매칭이 맞는 것일까? 하여튼 테슬라를 빼고 텔레풍켄으로 듣기로 한다. 6년 만의 화려한 등장인 셈이다. 결국 12AX7 텔레풍켄 진공관 컨버터와 초단 12AX7 텔레풍켄 레벤의 매칭인 셈이고 인터 역시 듀얼런트 웨스턴 주석선 복각이니 그야말로 KEF 빈티지라 할 수 있다. 소리는 겁나 좋다.
출력관 EL84의 구관 멀라드가 있고 유명한 미니와트도 있다. 바꿀까 말까! 그것이 문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