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의 사설입니다.
우편향의 조선일보이지만, 내용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하고 비판해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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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노무현 정권 최대의 골칫거리는 아무래도 미국이 틀림없는 듯하다. 여당의원이 폭로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미국 관계 문건(文件)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정권 출범 이래 3년 내내 이 정권과 미국 사이엔 빤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 정권 사람들이 그간 토해낸 대미(對美) 관계 어록(語錄)에는 ‘성가신 미국’이란 냄새가 풀풀 난다. “반미(反美) 좀 하면 어때서…” “미국과 할 말은 하는 사이로 만들어 가야…” “미국인보다 미국을 더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이 탈…” “영어깨나 하는 사람들이 늘…”. 따져 보면 못할 것도 없는 말이다.
걸리는 건 이 정권 사람들이 미국을 향해 뱉어온 이런 말의 반 토막도 북한에겐 대놓고 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반북(反北) 좀 하면 어때서…” 하는 겁 없는 말은 기대도 않는다. 그렇다 해도 “북한에게도 할 말은 할 것…” “북한사람보다 북한정권을 더 받들어 모시는 일부 남쪽 사람들이 탈…”이라고는 못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이 대목에만 이르면 입을 꾹 다물고 마는 게 이 정권 사람들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할 말은 하는 사이’라는 대미(對美)관계와 ‘할 말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물어야 했던’ 대북(對北)관계, 이 두 대차대조표의 내용이다. 미국과의 3년은 ‘할 말 하는 걸로’ 기분만 내다 항상 실속을 잃는 거래로 끝났다. 결론은 늘‘미국이 하자는 대로’ ‘미국이 가자는 대로’였다. 이라크 파병문제는 집권세력 안에서 찬반(贊反)을 놓고 지지고 볶으며 기다리는 쪽의 진을 뺄 만큼 뺀 다음 보냈다. 미국·영국에 이은 세계 세 번째의 파병 규모다. 그런데도 고맙다는 인사치레도 받지 못했다. 이라크 전후 복구사업 참여 운운하더니, 그것도 알짜는 파병 규모가 우리보다 한참 아래인 폴란드·스페인에 돌아갔다. 이것이 때를 맞추고, 때를 놓친 차이다. 박정희는 월남 파병을 월남전 특수(特需)와 중동 진출로 다리 놓듯 이어가면서 한국 경제 오늘의 기틀을 닦았다. 허구한 날 박정희 뒷조사를 한다면서도 월남 파병과 이라크 파병의 비교 결산서는 뽑아 볼 생각도 없는 모양이다.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우리 국민이 동북아시아의 분쟁에 휘말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작년 3월 대통령의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연설로 호기롭게 출발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논란의 뒤끝은 허무하기까지 하다. 대통령의 이 선언은 주한미군을 한국 밖 분쟁지역에 투입하는 걸 반대하는 말로 들렸고, 그렇다면 미국 세계전략과의 정면 충돌, 나아가 주한미군 철수로도 이어질 수 있는 사안이었다. 여당의원의 폭로대로라면 이 역시 결국은 ‘미국이 하자는 대로, 가자는 대로, 달라는 대로’ 결판이 났다는 것이다. ‘3일 천하(天下)’로 끝났던 ‘동북아 균형자론’ 소동에 이어 한국 외교는 이번에도 입으로 기분만 내다 미국의 의심만 산 셈이다.
이 정권은 대미외교 최대 전리품(戰利品)으로 미군에게서 작전권을 되찾는 걸 꼽는다. 그걸 위해 앞으로 상당 세월 동안 600조원 가까이를 퍼붓겠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1954년 버티고 버티다 UN군이 한국 방위를 책임지는 동안 한국군을 UN군의 작전지휘권 아래 두기로 못 이기는 척 미국과 합의했다. 그 대가로 미국에게 1955년도에 4억2000만 달러의 군사원조, 2억5000만 달러의 경제원조, 10개 예비사단 추가신설 장비, 79척의 군함, 100대의 제트전투기를 미국에 요구했고 끝내 그 약속을 받아냈다. 이승만 정권과 이 정권의 대미외교 수지(收支) 격차는 결국 두 정권 지도자의 경륜(經綸)과 기량(技倆)의 차이다.
이 정권 사람들은 이승만이 한국의 안전보장 없는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집행장(the death warrant of Korea)’, ‘이의(異議) 제기조차 봉쇄한 사형 선고(a death penalty without protest)’라는 험악한 친서로 트루먼과 아이젠하워라는 두 미국 대통령을 윽박질러 싫다는 미국을 멱살잡이 식으로 끌고 가 도장을 찍게 했던 한·미방위조약의 숨은 역사를 알 턱이 없다. 그 역사를 모르니 한·미동맹을 함부로 다루는 것이다.
그래도 미국과의 거래는 낫다. 기분이라도 냈으니 말이다. 할 말도 못한 채 끌려만 다닌 북한과의 거래는 주판 놓을 건더기조차 없다. 3년 내내 건건(件件)이 줄줄이 떼이기만 해왔다.
결국 이 정권 외교의 총결산은 ‘미국과는 밑지고 북한에겐 떼인 3년 세월’이란 한마디로 족한 셈이다.
(강천석 · 논설주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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