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청연 때문에 말이 많군요. 저는 윤종찬 감독의 첫 작품인 '소름'을 감동적으로 본 관객으로서 그의 의식세계와 작품세계를 일단은 지지합니다. 감독이 적어도 친일을 위해 이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을것 같은데요.(이건 우리나라에서 자살행위이지요. 큰 자본을 등에 업고 작업하는 영화의 속성상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구요, 또한 소름을 본 관객으로서 그의 정치의식에 대한 믿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논란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이 소재를 영화화한 데에는 다른 확신이 있었을 것이고 또 연출의 전략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이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영화를 보고 이야기 해야 하는게 기본이 아닐까요? 무조건 영화를 보이콧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 이 문제에 대해 보다 풍부하게 또 섬세하게 논할수도 있는 문제이구요.
청연 홈페이지에 갔더니 영화기자 두명의 인터뷰가 있길레 퍼왔습니다. 섣불리 판단하기 전에 한번쯤 읽어볼 필요가 있는것 같습니다.
영화전문기자 오동진과 중견 영화평론가 김영진이 개봉영화 가운데 한 편을 골라 벌이는 사이버 영화논쟁을 매주 게재한다. 이번 주는 윤종찬 감독, 장진영, 김주혁 주연의 〈청연〉이 도마에 올랐다.
지난 12월 21일 처음으로 공개된 윤종찬 감독의 〈청연〉이 평단으로부터 고른 지지를 받아 개봉 전 일단 안정적인 숨고르기에 들어간 상태다. 그러나 20대층 관객들로부터는 다소 엇갈리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도 사실. 따라서 개봉 후 흥행 여부는 아직 판단하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는 제작기간만 무려 3년이 걸렸으며 미국과 중국, 일본을 잇는 해외 로케이션을 통해 제작됐다. 2001년 〈소름〉 이후 윤종찬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청연〉은 어떤 영화?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비행사로 알려진 박경원의 일대기를 그렸다. 홀홀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비행학교를 독학으로 다니며 비행사의 꿈을 이뤄 나갔던 신여성의 분투의 인생역정, 일본 군국주의에 의해 희생당하는 그녀의 꿈과 사랑이 비극적으로 펼쳐진다. 박경원 역은 장진영이, 그녀의 연인 역으로 일본군 장교였던 한지혁 역은 김주혁이 맡았다. 청연(靑燕)은 푸른 제비라는 뜻.
오동진 : 영화는 우려를 씻고 성공적으로 완수된 것 같았다. 마치 단아한 문체로 된 깔끔한 소설 한 권을 본 듯한 느낌이었다.
김영진 : 나도 그랬다. 근래 나온 대작 가운데 가장 탄탄한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오동진 : 윤종찬 감독의 이야기 구성 능력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줬다. 사실은 매우 진부하게 흘러갈 수 있는 이야기였다. 난 무엇보다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건드리지 않고 그것을 외곽의 아우라로 툭 쳐넣어 둔 게 마음에 들었다. 만약에 그걸 내세웠다면 이 영화는 진짜 못 봐 줄 작품이 됐을지도 모른다
김영진 : 맞다. 굵은 이야기에 대한 강박을 떨쳐버린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자기 운명을 통제하지 못하는 개인의 비극이 식민지 시대와 맞물려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니는 플롯 구성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시대의 불우가 깔리니까 더 애잔했다. 박경원이나 한지혁이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인간들이 아니었으면 더 나은,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동진 : 인간의 삶을 움직이는 건 이데올로기나 국가 뭐 그런 게 아니라 실존적 상황에 따른 선택이라는 거다. 그런 주제가 호소력을 주더라. 왜 극 후반의 면회 신(한지혁과 박경원 둘 다 조선적색단으로 오인받아 일경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박경원이 먼저 풀려나 한지혁을 면회하는 장면 ? 편집자) 있지 않나. 거기서 한지혁이 박경원에게 말하는 대사가 아주 기억에 남는다.
김영진 : 뭐라고 했지?
오동진 : 비행을 하라고 얘기한다.
김영진(좌), 오동진(우). ⓒD&D 미디어
김영진 : 아하
오동진 : 일장기를 달고 중국까지 횡단비행을 하는 것에 대해 매국노 소리를 들을까 봐 두려운 게지, 라고 하면서 그냥 비행하라고 얘기한다. 별 다른 방법이 없잖아?, 라면서. 그게 아주 현실적이더라. 만약 상투적인 드라마였다면 그러지 말라는 둥, 조국이니 민족이니 들먹이지 않았을까 싶다?
김영진 : 맞다. 매국노가 되더라도 장거리 비행을 하고 싶다는 박경원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오동진 : 어떤 선택이든 난 널 지지한다는, 한지혁의 그 태도도 마음에 들고. 그게 결국 그건 윤종찬의 태도가 아니겠어?
김영진 : 인정.
오동진 : 이야기 구성에 있어서는 전체적으로 조금 흔들었으면 어땠을까 싶기는 했다. 오프닝을 후반부 장면인 폭풍우가 치는 비행 신으로 가면서 중간중간 파편적으로 플래시백을 넣는 구성이었으면 좀더 긴장감이 있지 않았을까? 앞의 1시간 가량이 자칫 문예영화 같은 느낌이다. 계몽주의 문학 같은 느낌이 살짝살짝 나와서 말이다. 조금 구성을 탄력적으로 갔으면 좋았을 걸 싶었다.
김영진 : 그럴 수도... 중반 부분에 리듬이 좀 처지는 게 사실이니까. 근데 비극적인 톤을 살리는 구성에선 그것도 여하튼 적절한 리듬이 아니었나 싶다. 난 좀 졸긴 했지만.
오동진 : 그렇지. 그렇게 상승시키긴 한다, 감정을.
김영진 : 그래도 윤종찬의 연출공력이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인물의 감정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 화면 사이즈 감각, 클로즈업이나 미디엄 쇼트의 감이 확실히 이 사람은 뛰어나다.
청연. ⓒ프레시안 무비
오동진 : 음 그건 정말 인정. 한 장면 한 장면, 감독이 엄청난 공력을 들였다는 걸 느낄 수가 있더라. 근데 그 비행 신들은 도대체 어떻게 찍은 거지? 정말 잘 찍었던데. 그거 어느 정도가 CG야?
김영진 : 아날로그와 특수효과를 무식하게 섞었더라.
오동진 : 무식하게? 하하. 난 더 무식해서 그게 분간이 잘 안가더라. 어디가 아날로그고 어디가 CG인지.
김영진 : 실제로 비행하는 장면을 찍고, 그걸 CG와 섞고 세트에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찍고, 해서 5개의 커트가 이어지면 미국, 중국, 한국 세트장에서 찍은 커트들이 계속 이어지는 식이었다고 하더라. 5초 분량에 3개국에서 찍은 커트들이 더 섞이는 식으로
오동진 : 미쳤다 정말. 그러니 중간에 제작이 중단되지.^^
김영진 : 매뉴얼이 없었을 테니.
오동진 : 그건 어땠나? 1930년대의 여성상이 다소 오버하는 느낌 아니었나?
김영진 :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한다 실제로 1930년대의 신여성들은 조선 반도 전체를 가르치겠다 이런 기개가 있었다. 나혜석이니 뭐 그런 여성들 삶이 실제로 그랬다더라. 그런 기개 아니면 어떻게 그 시대에 그런 야망을 품었겠나. 지금 시대에 비하면 훨씬 스케일 큰 인간들이 일부 있었다 그때는.
오동진 :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드(mode)가 너무 현대적이다. 너무 모던해. 마치 지금의 여성주의 문제를 들이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김영진 : 보니까 대사는 요즘 식이고 미술이나 의상은 사극이던데
오동진 : 당시의 보수적인 기조나 분위기가 조금 더 밀도감 있게 깔렸어야 되지 않았을까? 근데 박경원이라는 신여성을 대하는 모든 남성들의 태도가 매우 일률적이다. 그게 조금 더 다양했으면 싶었다.
김영진 : 아니, 난 지금 식도 좋다. 너무 균형을 생각하면 영화가 굳어지니까 그보다 난 철저하게 더 박경원과 한지혁 쪽으로 더 이야기가 몰렸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오동진 : 사실 샛길로 가려는 걸 많이 자제한 것 같더라.
청연. ⓒ프레시안 무비
김영진 : 배우들 연기는 어땠나?
오동진 : 배우들은 좀 끌려가는 듯한 인상이었는데? 그래도 후반부부터는 좋았다. 저격장면 이후부터 말야. 거기서부터는 감정이입들을 좀 제대로 하던걸?
김영진 : 너무 제작기간이 길어지니까 애로사항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근데 여하튼 열연은 하더라. 장진영은 초반엔 좀 이물감이 들었는데 나중엔 나도 이입이 되던데?
오동진 : 이런 대목도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한지혁이 박경원한테 결혼하자고 하는 장면. 거기서 한지혁이가 그런다. 불안해서 그런다고. 지금 너하고 결혼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해서 그런다고.
김영진 : 아하.
오동진 : 식민지시대 청년, 여성들의 불안감이 지금도 통하는 것 같지 않았나? 그래서 이 영화의 통시성이 느껴지더라. 당신이나 나나 지금의 우리들 역시 불안하잖아.
김영진 : 인정. 근데 이 영화를 두고 친일파 운운하는 건 뭔가?
오동진 : 아~ 박경원의 친일행적이 기사화되고 있는 모양이다. 황국신민 자격으로 만주 횡단 비행을 시도하고, 일장기 들고 비행기 앞에서 사진 찍고 하는 등등.
김영진 : 난 그런 것도 오버라고 본다. 천황의 치어리더 운운하는 기사 제목들 말이다.
오동진 : 윤종찬은 박경원의 그런 모습을, 실존적 선택의 문제라고 보는 것 같았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착각할 뿐 이념의 방향대로 살 수 없다는 거지. 난 그 현실인식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조금 위험하긴 하지.
김영진 : 왜?
오동진 :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조금 튀겨서 얘기할 때 많은 친일 행적들을 변명해 줄 수 있는 논거가 되니까. 실존적 선택이라는 거 말이다.
청연. ⓒ프레시안 무비
김영진 : 근데 나는 이 영화에서 한 인물의 실존적 선택에 관한 근거를 충분히 풍부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봤다. 그리고 박경원의 친일 행적 여부에 관해서도 피해가지 않았다고 보고. 다만 거기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는 거지. 그건 중요한 차이라고 본다. 난 요즘 너무 선명한 입장에 서서 뭘 얘기하려고 하는 언론이나 사람들이 짜증이 난다.
오동진 : 맞다. 나도 짜증난다. 근데 실제로 윤종찬 감독이 고민했던 건, 박경원의 선택을 변명처럼 보이게 하지 않으려고 했을 거다. 마치 이런 거 있지 않나. 너, 그 시대 살아봤어? 살아 본 사람들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같은 변명 말이다. 그걸 줄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관객의 선택으로 남긴 거지.
김영진 : 맞다. 헌데 영화가 개봉하기 직전에 기사를 내보내고 그걸로 영화관람 찬반 풀을 개설하고 이런 건 정말... 이런 유형의 영화가 보여주고 싶었던 그런 배려, 삶에 대한 신중한 시선, 이런 것과 정반대의 천박한 짓 아닐까?
오동진 : 지금 우리가 그런 걸 하고 있는 건가?
김영진 : 우훗, 그렇진 않겠지. 난 여하튼 이 영화가 진정한 스펙터클이 될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동진 : 진정한 스펙터클! 좋은 얘기다. 영화는, 그게 블록버스터가 됐든 특수효과 영화가 됐든 철학이 있어야 한다 철학이.
김영진 : 볼거리를 위해 강제된 이야기, 캐릭터들은 이제 더는 못 보겠다.
오동진 : 맞다. 오히려 더 지루하다.
김영진 : 윤종찬은 앞으로 한국영화계의 굵은 거목이 될 것이다.
오동진 : 이 영화가 〈소름〉 때처럼 잘 만든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에게 외면 받을 소지가 있다고 생각하나?
김영진 : 난 외면 받지 않을 것 같다. 일단 볼거리가 있고 신파까지는 아니지만 울컥하게 만드는 클라이맥스가 두 번 있으니까.
오동진 :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탁 떠오르는 장면은 〈원더풀데이〉 같은 어느 애니메이션이 해낸 것보다 더 판타스틱하더라.
청연. ⓒ프레시안 무비
김영진 : 그 장면은 올해의 명장면이다.
오동진 : 근데 젊은 관객들이 이럴 것 같아. 청연이 무슨 뜻이야?
김영진 : 흠...
오동진 : 고런 난제가 좀 있을 듯싶다. 어렵다는 게 아니고. 다소 고답적으로 느껴질 수 있거든.
김영진 : 그래도 여기저기서 노출된 이미지나 김주혁 때문에 보러 가지 않을까?
오동진 : 마지막 장면에서 나도 울었다. 아이가 비행기를 얻어 타서 손을 흔들다가 장진영이 비행하면서 손을 흔드는 장면으로 교차 편집되는 장면. 그거 좋던데. 처연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왜 박경원이가 그렇게 비행을 꿈꾸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 장면에서.
김영진 : 나도 영화가 어떻게 끝날까 궁금했는데 수긍이 가더라.
오동진 : 자 어쨌든, 이 영화는 투 썸즈 업?
김영진 : 오케이. 투 썸즈 업!
정리 오동진/프레시안무비 수석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