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서없이 쓴글이라.. 딴데 옮기시면 -_-;;
황우석 신드롬과 파시즘?
황우석과 피디수첩간의 전쟁같은 논란을 지켜보면서 그것에 네티즌과 기타언론의 가세로 신드롬이라 불릴만한 일들이 수주동안 벌어지고 있다. 이를 두고 애국주의 파시즘이라고 겁을 주는 것을 또한 보게 되며, 그런 담론이 또하나의 신드롬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네티즌의 절대다수가 엠비씨방송국에 비난을 쏟아내고 있고, 엠비씨를 욕하는 것이 황우석교수를 구하는 길이며 더할 나위없는 애국인것처럼 비춰지는만큼 조금이라도 피디수첩을 두둔하려 했다가는 음모론자는 물론이고 비애국자, 비국민으로 몰릴지도 모를 지경이다. 적어도 온라인의 게시판에서 오가는 논란 속에서는 그렇다.
‘비국민’의 입장에 끝에쯤 가면 ‘애국주의’, ‘파시즘’이라는 극언이 나오고 있고, 이것은 또다시 반응을 증폭시켜 그들의 최후의 발악으로 치부되는 것도 사실아닌가.
이런 파시즘 논쟁에서 파시즘이란 말이 가지는 극단적 성격이 가지는 의의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어떤 사태를 두고 21세기의 현실에서 쉽사리 파시즘이라고 재단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만큼 신중해야할 단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단어 선택의 신중함을 넘어 과연 파시즘은 있냐 없냐의 대상이 되거나, 옳은가 그른가의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인가. 파시즘이 아니라고 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그 사태의 한 부분에 정말 파시즘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문제는 파시즘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떻게 파시즘화 될 수 있는 것인가, 파시즘이라고 말할 조건은 무엇인가가 먼저, 적어도 한번은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이런 파시즘의 논란에 대해 근년에 한국에는 여러 번 있지 않았을까. 80년대, 통반장의 인솔하에 담임의 인솔하에 공설운동장에서 우리가 때려죽이자고 외쳤던 붉은무리 공산집단, 역사왜곡일제만행은 접어두자. 민주화된 시기 우리가 겪었던 앞선 두사건, imf 금모으기 운동과 월드컵을 메웠던 붉은악마의 물결에 관한 얘기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월드컵의 논란은 익히 기억하겠거니와, 새삼 금모으기 운동을 떠올리는건, 그또한 국가의 안녕과 발전을 위한 국민들의 자발적 행동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땐 누가 그런말을 꺼낸적은 없지만 그 열풍과 참여 국민의 숭고한 가치를 생각하면 결코 다르지 않다는 판단이다. 그리고 지금 황우석을 위한 지극한 국민의 정성과 열의를 생각하면서 이 셋을 묶어 무엇이 파시즘적이고 어떻게 하면 그것에 매몰될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 이번 황우석 사태가 진행되면서 자칫하다가는 우리 스스로 파시즘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미리 말하거니와, 파시즘은 거기에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자발성을 내세운 참여를 통해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행여 이 사태를 파시즘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몰아가는 것은 민노당의 사설이나, 음모자의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에 반응하며 열의를 쏟는 (지금으로서는)다수의 네티즌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윤노빈의 <신생철학>에서 기억남는 것은 진정한 해방이란 무엇인가 하는 성찰이었다. 아흔아홉마리의 흰양이 한 마리의 검은 양을 영웅으로 받들고 추켜세우는 것이 양들의 해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상일 수밖에 없다. 희나 검으나 보편적가치로서의 양떼들이 그들의 실존을 깨닫고 획득할떼 전체 양들의 해방은 온다는 것이 윤노빈의 성찰이 아니었던가.
황우석의 사태로 돌아가보자. 이글을 읽을 어느시점에 지금 문제되고 있는 진위논란은 접어두겠다. 그 샘플이 가짜든 진짜든, 즉 누가 죽든 그것에 지금 이문제에 닿지 않는다. 우리가 황우석을 어떻게 떠받들었고, 어떻게 엠비씨를 비난했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황우석이 몇 년사이 국가적 영웅으로 떠올랐을때, 많은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에게 국민적인 성원을 보내면, 그가 세계의 최고가 되어 우리를 살릴 것이고, 국가의 이익을 끌어올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가 조금만 더 도와준다면 말이다. 애닯고 조급한 그들의 마음에 애국심이라는 말을 붙인다고 그것으로 어찌 해악이 될 수 있겠는가. 언제 가능할지도 모를 줄기세포 치료를 원하는 환자의 행렬이 오버센스요 과시적 행사라고 해도 그 들뜬 애국심을 비판할 마음이 없는 것처럼 의연히 볼수 있다.
그러나 이 영웅 황우석의 탄생이 과연 진정한 의미의 해방이요 인류의 행복을 위한 발전이라 할 수 있을까. 더 좁혀 그것이 진정한 대한민국의 국익으로 연결 될 수 있을까. 다시말해 적어도 황우석의 줄기세포의 대가가 되어 국민의 뜻대로 지존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고 한들 그것이 다수의 국민의 삶에 어떤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IT를 지나 이제는 BT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이 대한민국의 국익증대에 BT만이 유의미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5천만이 사는 이 땅에 그가 영웅으로서의 유일한 가치를 담보하는가 말이다.
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기화로 차근차근 하나씩, 다른 것들도, 라고. 정확한 말이다. 이렇게 하나씩 해나간다면 우리도 언젠가는 선진국이 되어 있지 않겠는가. 그러한 점에서 파시즘을 만들지 않는 것은 네티즌들의 몫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바꿔말해 이 상황에서 파시즘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도 네티즌들의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다.
황우석의 세계정상에 근접해 있기 때문에 그가 우선적으로 영웅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그런 정상권이 과연 황우석만 있을까. 각 대학 실험실에, 연구소에 제2의 황우석이 분명 존재하고 있다. 과연 그들에게 우리 네티즌들은 이와 같은 열의와 성원을 보내줄 수 있을 것인가? 일천여명의 난자 기증예정자들 중 때가 되어 난자가 필요할 때 거룩하게 난자를 품어 내줄 사람은 현실적으로 얼마나 될까? 이들 질문은 파시즘으로 가느냐 마느냐의 작은 척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고 싶은 것은 우리의 국익을 지켜내줄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지속적으로 찾아서 그것에 진실되게 가치를 부여하고 성의껏 응원해 줄 수 있는 현실적인 가능성이 우리 사회에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열악한 상황속에서 먼지묻은 문헌을 뒤지고 있을 연구자들. 돈 안되는 학과에서 십수년을 허비하는 학자들을 국익의 수호자로 찾아내줄 역량이 있는가. 나아가 작은 풀한포기를 지키거나 작은 생명하나를 지켜나가는 보잘 것 없는 활동가들을 ‘이익’으로 생각해줄 작은 성의가 있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회의적이다. 우리가 대한민국에 있어서 자괴감을 느끼기 때문이 아니라, 어디를 통틀어 봐도 이들을 영웅으로 치켜세워주는 사회는 찾기가 지난하다는 걸 오랫동안 봐왔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돈이 되는 것에만 열광하고 흥미로운 것에만 감동을 하지 그것을 벗어나서 좀더 본질적인 것에는 쉽게 눈을 돌리지 않는다. 모두가 성자가 아니고서는 실은 불가능할지 모를 일이다.
황우석 신드롬을 발전적으로 이끌어 나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우상을 세우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추상적인 인류 보편적 가치를 미리부터 논하지는 않겠다. 대한민국의 강역에서만 보자. 영웅 황우석에 열광하는 사이 우리 사회에서 당장, 정말로 필요한 것에 계속해서 눈을 돌려나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국익’이 될 수 없다. ‘소중한 외화획득’만이 국익이라는 말에 절대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면, 국익의 실현의 현실적인 가능성들을 살펴보잔 말이다. 오로지 돈되는 것만 추켜세워 올리는 것을 국익으로 강요하지 않길 바란다. 특정한 어느 하나에 집중되도록 의도되고 이끌려 가는 것. 그것에 관한 열광을 파시즘이라고 부를 수 없겠는가. 국익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절대 국익이 될 수 없는 것에 쏠려가는 것. 그것이 파시즘이 아니고 뭐겠는가. 그러니 파시즘을 만들어 가는 것은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또한 정당한 의문에는 정당히 대답하는 것이 과학자 황우석의 의무이자 권리일 것이다. 이것이 열광속에 묻혀버린다면 그 길의 끝은 더욱 분명해진다.
황우석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는 것에는 이런 걱정이 작용하고 있었다. 거칠게 말해 이 모든 성과가 특정 집단 중심으로 쏠려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 스스로 영웅이 되기 위해 언론을 활용한 정치행위를 하고 있는 것, 그런 야망과 과학적 성과물이 한 데 어울려 국가적 열망과 신의를 독차지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 말이다. 그런 것은 유치한 시기와 질투는 길게 생각할 것이 아니다. 문제는 지금껏 얘기한 바, 황우석 열풍을 국익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대단한 각오와 각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금모으기 운동과 월드컵 열기를 얘기 했었던 것도 이런 점에서이다. 박노자는 성직자들이 한국을 응원하더란 얘기로 시작하여,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논했었다. 보편적 가치를 생각하는 세계인의 눈에서 보면 사실은 맞는 얘기겠지만, 오딧세이 같은 세계인을 경험해보지 못한 우리로서는 솔직히 너무 먼 얘기다. 그러나 그것이 대한민국에 국한된 이야기라고 해도 우리의 삶에 긍정적 작용을 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현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금모으기 운동에 대해서도 그것이 무엇을 남겼는가를 성실하게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파시즘이냐 아니냐는 그 사태에 휩쓸린 대중들이 만들어 나간 결과물이 결정짓는 것이다.
또하나 첨언하자면, 우리가 생각해야할 국익에 연구실 내의 고생하는 말단연구원을 생각해줄 빈 자리는 없는가 하는 것이다. 제보자에 관한 추측이 난무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처한 악조건을 생각하는 것은 어떠한가. 가정컨대, 피디수첩 파문이 없이 승승장구 하던 황박사 팀원 중 한사람이 미국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고 생각해보자. 배신자로 몰리지 않고, 최저생계비에도 못미치는 소득으로 주야로 연구실에 매달려 온 그들에게 동정론이 대세로 흐를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오로지 신성한 자부심과 신념으로 견뎌내라고 말하는 것에 국익이 있다면 그것이 파시즘으로 변질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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