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말하는 조선일보의 진실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고 각색하는 조선일보
『조선일보』는 일제의 식민지배라는 조건 속에서 친일 신문으로 출발하고 민족을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며 항일 민족지였다고 강변하고 있다. 그들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그 부끄러운 역사를 시인하거나 사과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조작 왜곡하면서 국민을 속여왔다. 그 당연한 귀결로 이러한 왜곡이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끼쳐왔다. ......
이 글의 목적은 『조선일보』의 진정한 역사를 간단하게 재조명해 보는 데 있다. 일제시대에서의 친일행적과 상업주의적 태도, 해방 후 특히 박정희 정권 이후의 권력유착, 극우반공 이데올로기와 안보상업주의로 사세를 신장시키고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을 확대 재생산해 온 과거를 밝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항일 민족지와 반독재 투쟁, 불편부당을 사시로 한 정론지라는 허울로 포장된 가면을 벗기고자 하는 것이다.
민족지인가? 친일지인가?
『조선일보』는 민중들에게 친일 신문으로 인식되어 애초에 주식투자를 하기로 했던 대정실업 친목회 회원들이 주금납입을 미루고 독자확보도 제대로 되지 않아 극심한 자금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조갑제 편집장이 민족자본이라고 주장하는 대정실업친목회는, 『조선일보』가 권위를 부여하는 정진석 교수(한국언론사. 1990. 나남. 402쪽)도 친일단체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조선일보』는 자신들이 친일 신문이 아니라 오히려 항일 민족지라는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독자를 확보하여 경영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1920년대 초 총독부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가 나가는 것을 방치했다. 이를 두고 그들은 항일 민족지였다고 강변하고 있다. 그래도 여의치 않자 1924년에는 사회주의 기자들을 대거 채용하여 아예 사회주의적 성향을 선택하기도 했다. ..... 그러나 1926년 이후로는 그나마의 비판적인 논조도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고, 1930년대에는 오히려 총독부에 밀착되어갔다.
특히 1933년에 방응모가 인수한 이후에는 『동아일보』와의 상업적인 본궤도에 들어가고 , 중반을 넘어서면서는 아예 형식적이나마 달고 있던 민족지의 꼬리를 완전히 내리고 친일지로 탈바꿈했다. 광주학생운동을 불온하게 묘사하고, 요즈음 이슈가 되고 있는 준법서약서의 원조인 사상범 관찰령을 옹호하고,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국방헌금을 독려하고, 동포 청년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지원병 제도를 찬향하는 등 친일행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예를 몇 가지 들어보겠다.
"광주학생사건에서 발단이 된 학생시위사건이 전 조선에 확대된 오늘날에 있어 제군이 비상(非常)을 버리고 평상(平常)에 돌아와 고요한 책상 앞에 용기 있게 돌아오는 것은 당연하다. … 허다한 불만과 실망 속에 이토록 확대된 것은 학생들의 불행이자 조선의 불행이었다." (1930년 1월 12일자 사설, 동요중의 학생제군 책상 앞으로 돌아가라」)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은 사회개조를 목적으로 한 사상범을 대상으로 하는 법령인만큼 사회적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 운용을 잘못하면 저차 몰락의 길을 걸어가는 사상운동에 도발적 반동기운을 조장할 수도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할 필요가 있으리라고 사유한다." (1936년 12월 13일자 사설,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
"조선 통치사상에 한 '에포크 메이킹'이요, 南 총독의 일대 영단정책하에 조선에 육군 특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게 된다는 데 대하야 이미 본란에 누차 우리의 찬의를 표한 바 있거니와 거(去) 4월 3일의 신무천왕 제일을 복(卜)하야 본궤도가 공포되고 그 실시에 대한 모든 준비가 착착 준비중에 잇섯는데, 그 동안 일반 민중의 열열한 기대 가운데서 지원병 원서접수 기한인 4월 10일까지에 지원자 수는 3천 명을 초과하는 성관(盛觀)을 나타내엿고 … 이것이 어찌 국가의 성사(盛事)가 아니며 경행(慶幸)이 아니랴." (1938년 6월 15일자 사설)
이러한 친일 행각은 1935년에 창간된 자매지 『조광』(『월간조선』의 전신)으로 인계되어 계속 맥을 이어간다. 『조광』의 대표적인 친일 사설로는 「전몰 영령을 조함」(1940년 4월호), 「성수무강」(1941년 1월호), 「극동위기설과 국민의 각오」(1941년 4월호), 「동아공영권 신장과 국민의 각오」(1941년 6월호)등이 있다. 방응모는 개인적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황군에 지원하도록 하는 등의 강연을 하고 다니는가 하면 여러 친일 단체의 임원이 되었고, 거액의 국방헌금을 희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1988년의 언론청문회 때 증인으로 출석한 방우영 사장(현 회장)은, 이철 의원이 『조선일보』의 친일 전력을 언급하자 "조선일보가 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했단 말이오? 악랄한 조선총독부 아래 선열들이 독립을 지키기 위해 고문당하고 피 흘린 것을 매도하지"말라고 도리어 역정을 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독재 저항의 의미
다른 친일 협력자들과 마찬가지로 해방공간에서 숨어 지내던 방응모 등은 친미노선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선택하면서 재기를 모색하게 된다. … 조선의 사정을 잘 모르고 협력자를 필요로 했던 미군측에 접촉한 친일분자들은 바로 여기서 살 길을 발견하고 바짝 밀착한다. 이에 따라 1940년 강제폐간 당시 인쇄시설을 몽땅 처분했던 『조선일보』는 "군정청의 우호적 지지와 이해 있는 알선에 의하여"(1945년 11월 23일 속간사)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사(해방 후에는 서울신문사)의 시설을 이용하여 신문을 복간할 수 있었다.…
임정을 이끌었던 김구 선생을 지지하는 노선을 취한 『조선일보』는 김구가 암살된 후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원조경제에 의해 의존하던 한국경제의 취약한 구조하에서 본격적인 비판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본격적으로 적대적인 논조를 보인 것은 정권 후반기로 접어들어서이다. 실정이 극에 달하고 민심이 이반되면서 정권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본격적인 비판에 나선 것이다. 이를 두고 마치 민주주의를 위한 반독재 투쟁을 했고 그래서 부패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렸다는 식의 단선적인 주장은 어폐가 있다고 하겠다.
친독재 권언유착의 시대
박정희 정권은 집권 이후 언론사 정비에 나선다. 이 조치로 서울에서는 일간지의 경우 47개가 등록이 취소되고 15개가 살아남았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정부가 인위적으로 시장의 독과점구조를 형성하여줌으로써 안정적인 영업구조를 보장해준 데 있다.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신문사에 대해서는 장기 저리의 시설확장 자금과 운영자금을 융자해주었다. 조선일보사는 연리 7∼8%의 상업차관을 들여와 코리아나 호텔을 지었다. 호텔이 완공된 1972년 이후 정부의 압력으로 인해 『조선일보』는 많은 이득을 남긴 반면 국책은행인 주택은행에 엄청난 손실을 입혔다.
이러한 특혜를 입은 『조선일보』가 박정희의 3선 개헌과 유신개헌을 찬향하고 나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3선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 하루 전인 1969년 10월 16일자 「각계 인사들이 본 '성장한국'」이라는 기획기사를 보면, 대학총장에서부터 영화배우, 탤런트까지 망라한 11명의 의견을 실었는데 모두 한결같이 개헌을 지지하고 찬양하는 내용 일변도였다. 그리고 투표 결과가 나온 후 19일자 사설 「국민의 심판은 끝났다 - 다수결에의 복종과 함께 소수파도 존중」에서는 "올해 초대의 정치적 쟁점이 되었던 개헌문제가 이렇듯 국민이 심판에 의해서 결말을 짓게 된 이상 비록 치열한 반대세력이 있었다 할지라도 민주주의의 원칙대로 이제는 다수결에 복종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정희가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10월 유신)한 것에 대해서도 『조선일보』는 온갖 미사여구를 총동원하여 적극적인 지지와 환영을 표명했다. 18일자 사설 「평화통일을 위한 신체제」에서는 "앞으로의 보다 보람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얻기 위하여 진정 알맞는 조치임을 기쁘게 생각"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알맞는 조치" "헌법 기능의 일부 정지와 아울러 이에 따르는 몇 가지 조치가 선포된 것은 새로운 헌정질서의 존립을 위하여 만부득한 조치" "비상사태는 민주제도의 향상과 발전을 위하여 하나의 탈각이요 시련이요 진보의 표현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등의 표현으로 찬사를 보냈다.
전두환 정권의 주주 노릇하며 사세 급신장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도들의 난동으로 묘사한 『조선일보』는 1980년 8월 23일자 「인간 전두환」이란 기사에서, 전두환이 사(私)에 앞서 공(公)을 생각하며 나보다 국가를 생각하고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며 운동이라면 못하는 것이 없다는 둥의 별의별 헌사는 총동원해놓고 있다. 그 다음 날짜 좌담기사 「'새 시대' 개막과 새 정치」에서는, 전두환을 '가장 잘 훈련되고 조직된 군부 엘리트로서 도덕성과 성실성이 뛰어나고 진취력이 강해 새 시대를 열고 새 정치를 펼칠 지도자'로 추켜세워 대통령 감으로 부각시켰다.
8월 28일자 사설 「새 시대의 개막- 전두환 장군의 대통령 당선에 제하여」를 보면, "우리는 우선 전두환 대통령의 당선을 온 국민과 더불어 축하하며 그 전도에 영광이 있기를 희원해 마지 "않으며 "전 대통령의 취임으로 바야흐로 새 시대 새 역사는 개막되고 있으며 국민들은 전 대통령 정부에 새로운 소망과 기대"를 건다고 되어 있다. ...... 이후 전두환의 집권 7년 동안 전두환 정권에 대한 맹목 적인 지지와 찬양은 끝까지 이어졌다.
『조선일보』는 전두환의 집권 7년동안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80년에 3∼4위를 맴돌던 것이 5∼6년 사이에 1위로 껑충 뛰어올라 2위를 멀찌감치 따돌리며 독주태세를 굳혔다. 80년 대비 87년 매출액이 428%, 79년 대비 87년 자산총액이 무려 927%로 늘어났다. 이 성장의 비결은 바로 권언유착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외에도 『조선일보』는 안보상업주의를 이용하여 스스로 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작문을 해대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이승복 신화로부터 시작하여 비과학적인 수맥 찾기로 땅굴발견 단정보도, 김일성 사망 오보, 성혜림 망명 오보, 금강산댐 대응댐 건설 촉구, 전교조 빨갱이 만들기, 박홍 키우기, 김일성 조문단 파견 파동 만들기, 북녘동포돕기 운동에 재뿌리기, 그리고 최근의 최장집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 빨갱이 만들기까지 그 예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역사가 주는 교훈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조선일보』는 80년에 육박하는 짧지 않은 역사에서 국가와 민족에 이익이 되기보다는 해가 된 적이 더 많았다. 특히 1980년대 이후에는 최대의 발행부수를 기반으로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악용하여 부와 권력을 축적했다. 최근에는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선동하여 오로지 권토중래에만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따라서 올바른 방향의 획기적인 전환이 없는 한, 『조선일보』는 우리에게 해가 되는 신문일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조선일보』의 영향력을 크게 줄여주어야 한다. 『조선일보』는 그 성향을 스스로 바꾸지 않을 터이므로 방법은 오로지 이것뿐이다 어떻게 줄이는가? 발행부수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일보』로 인한 악영향과 폐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김동민(한일장신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