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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증오에 매달리면 결국 자기 스스로 파멸될 뿐
시사종교 > 상세보기 | 2005-10-21 19: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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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965

제목

[펌] 증오에 매달리면 결국 자기 스스로 파멸될 뿐

글쓴이

이명재 [가입일자 : 2002-07-08]
내용
"증오에 매달리면 결국 자기 스스로 파멸될 뿐”홍윤기 동국대 철학과 교수



현재의 대한민국과 북한을 생각하고, 또 대한민국 안에서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남남갈등을 볼 때마다 나는 20세기를 10년 앞둔 시점에 통일을 달성한 독일을 겹쳐 보는 습관이 있다.



1989년 당시 독일은 통일을 언급만 해도 지적 수준이나 정치적 성향이 의심받던 때였다. 하지만 그 해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밤에서부터, 12월 말 동독 공산당이 자진 해산하고, 다음 해인 1990년 3월 동독 최초의 자유총선거를 거쳐 1990년 10월 3일 밤 왕년의 제국의회(지금의 연방의회) 앞에서 독일통일식이 거행되던 그 날까지 하루하루 새롭게 벌어졌던 베를린 풍경이 당시 베를린 유학 2년차였던 나의 눈앞에 지금도 어제 일처럼 하루 한 번씩 눈앞을 지나간다.



그 과정에서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오직 경제적 측면에서 라인강의 기적으로만 알려졌던 당시 서독의 ‘국가적 역량’을 정말 뼈저리게 체험하는 나날을 살았다.



솔직히 서독에 처음 갔던 1988년 6월, 나는 독일인들의 생활에서 부자 나라 사람이라는 인상을 거의 얻지 못했다. 독일 가면 가장 먼저 느끼는 인상이 뭔지 아는가. 참 옷 한번 멋없이 입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택들의 그 자잘한 모양새라고는, 그 안에 살림이 몇 점이나 들어갈지 의문스러운 단독 주택이 한두채가 아니다.



그러나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서독 복지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하다못해 나 같은 아시아계 유학생들에게도 육아 비용이나 주택 임대료가 상당 액수, 그것도 현금으로 보조되었다. 정말 이 나라가 내 생활을 떠받쳐 준다는 것을 유감없이 실감시켜 주는 데는 할 말을 잊을 지경이었다. 사실 구청에서 내 통장에 (Wohngeld라고 불리던) 임대료 보조금이 처음 입금 되는 날, 세상에 이렇게 사는 법도 있구나 하고 느낀 감정이 바로 오늘 아침 같다.



그러나 정말 까무러치게 놀랐던 것은 서독 민주정치의 뱃심이었다.



당시 우리가 빨갱이라고 인식하던 그런 정당, 아주 구체적으로 ‘독일공산당’(DKP)이 버젓이 연방 총선에 후보를 내고 자기 당의 정책 선전물은 물론 출판사까지 차리고 고등학교와 대학 부교재로도 사용되는 문고판 책을 대량 출간한 지가 거의 30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정당은 단순한 서독 자생 정당이 아니었다.



서독의 독일공산당은 동독의 독재 정당인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의 우당으로서 당운영 자금이 상당 부분 동독에서 유입된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돌아다녔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자면, 북한 조선노동당의 남한 지부쯤 되는 위상으로 인식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서독 공산당의 등록 당원은 공직 취임이 금지되고(Berufsverbot) 서독 정부의 정보기관인 헌법수호청(또는 ‘호헌청’Verfassungsschutz)의 공인된 사찰을 수용하는 것만 제외하고는 일반 서독 시민과 똑같은 자유를 누렸다.



그 자유 안에는 상당히 스탈린주의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공산주의 사상을 표현하는 것도 있었다. 호헌청의 사찰도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할 우려가 있는 테러 조직(예를 들어 적군파)과의 연계 여부에 집중되어 있었지 동독 체제를 지지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사찰 대상 밖이었다. 이런 서독 공산당원의 수는 공식 집계로 약 5만명 가까운 것이었다고 기억된다. 이런 서독 공산당과 같은 조직이 우리나라에 생겨 그 당원이 5만을 헤아린다면 아마 우리나라는 거의 광적인 정치적 히스테리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 서독 공산당의 존재를 제대로 알게 된 것은 유학 생활을 시작하고도 한참 지난 1989년 6월경이었다. 구청 주택과에 임대 주택을 구하러 갔는데 그 홍보물 전시대에 독일공산당의 주택임대정책 팜플렛이 아무도 보지 않은 채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삼엄한 군장을 하고 혹시나 자기네 시민이 공화국을 탈출할까봐 눈초리를 주로 자기네 쪽으로 돌리는 경비원들이 무표정하게 지키는 동베를린의 장벽 초소와 그 장벽 바로 아래나 옆에서 평화롭게 자기 집 정원을 가꾸는 서베를린 쪽 단독 주택 단지나 아파트군을 일년 가까이 보면서 어떤 생각 하나가 서서히 마음속에 자리잡아 갔다.



즉 전쟁 상황이 아니라면 이 냉전 최전선의 독일 땅에서 체제 경쟁은 끝이 났다는 것,



좌우 정당을 막론하고 국가를 책임진 정치인들이 자기 나라 시민을 신뢰하면서 그들에게 더 많은 자유(more freedom)와 더 높은 민주주의(higher democracy), 그리고 더 풍요롭고 정의로운 복지(just well-being)를 안겨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가운데 나라 안팎으로 평화의 체제를 만든 쪽이 그렇지 않은 쪽에 사는 인민의 마음(민심)을 끌어들일 것이라는 것,



이런 가운데서도 존재할 수 있는 극단적인 거부 세력 또는 심지어 반체제 세력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정치적 관용을 베풂으로써 그들의 공격성을 사상의 자유라는 관념적 선 안에서 완충시킨다는 것,



따라서 이들 극단 세력을 경찰력이나 검찰력을 동원하여 직접 물리적으로 억압할 경우 그에 동반되는 국가 폭력을 목격하는 가운데 의도하지 않게 다른 시민 전체를 공포 분위기에 밀어 넣을 수 있는 사회적 긴장을 예방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5만 공산당원을 잡아 죽이려고 물리력을 동원하여 감옥에 처넣거나 격살하려고 하다가는 나머지 4500만 국민들에게 엄청난 공포를 안기게 됨은 물론, 서독 국가의 성격 자체가 이 물리적 폭력을 체질화함으로써 결국 경찰국가 나아가 폭력국가가 될 우려를 서독은 필사적으로 피해간 것이다.



유태인 600만을 학살하기 위해 나치는 전체주의 병영국가를 만들어야 했고, 옆 나라 소련은 계급의 적 1000만을 압살하기 위해 그 큰 러시아 대륙 전체를 수용소(굴락) 국가로 만들어야 했다. 그 결과는 당연히 국가 자체가 망가지는 것이었다. 나치 독일은 패망했고, 소련은 자체붕괴했다.



서독은 자기 나라 안에 살면서도 동독을 긍정적으로 보는 소수의 사람들을 ‘주목’(注目)은 했지만 ‘주살’(誅殺)하지는 않았다, 그런 이들을 격살하려다가는 그들보다도 못난 짓을 해야 한다는 것을 나치즘의 경험을 통해 너무나 적나라하게 겪었기 때문이다.



증오의 역학에서 상호주의는 자기파멸로 귀결한다. 증오 관계에서는 미워하는 자와 동일한 짓을 하지 않는 것이 승리의 관건이다. 증오에 매달리면 증오하는 대상으로부터 공격받기도 전에 이미 자기자신을 스스로 파괴한다.



그리고 사실 한 나라를 운영할 때 그 나라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공격성과 폭력성에 대한 두려움만 없다면 삶의 평화는 반은 달성된 것이다. 그 밖의 문제는 서로 모여서 사태의 진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서로의 의견을 알아보면서, 지혜를 모아 공생공영의 방책을 모색하면 될 것이다.



나는 나의 대한민국이 서독 못지않은 그런 민주복지국가가 될 것으로 확신하면서, 아니 그런 나라를 만드는 데 내 베를린 유학 경험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귀국하여 오늘까지 지내왔다. 그리고 물론 그런 비전에 한발자욱씩 우리 시민의 힘으로 나아가는 느낌을 강하게 받기도 했다.



2002년 월드컵에서 붉은 악마 응원단이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AGAIN 1968'을 들고 나왔을 때 나는 아찔할 정도의 전율을 느꼈다. 북한이 이탈리아를 1-0으로 격파한 런던 월드컵에서의 승리를 마치 우리 대한민국의 승리였던 양 들고 나온 것은 명백히 국가보안법 제7조 1항의 반국가단체 찬양, 고무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가 적대시하던 북한 동포의 경험을 우리 것으로 껴안았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시민의 민주적 성숙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독일 통일이 15년 넘어가고 21세기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는 이 시점에 강정구 교수 사건으로 인해 우리 국가의 민주주의적 성숙도가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사회정치철학을 전공하는 나는 강정구 교수의 연구물에서 우리나라의 분단체제에 관한 통찰의 많은 부분을 자극받아 개인적으로 참으로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거의 독설에 가까운 언설이나 자기 연구의 몰입에서 오는 엄숙주의 같은 것에는 정서적으로 상당히 거리감을 느낀다. 더구나 한반도 분단체제의 고착과정의 원인이나 6 ·25전쟁의 평가, 그리고 현재 한미관계에 대한 의견은 상당 부분 토론하고 싶을 정도로 차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강 교수가 거의 실험실 수준에서 제시하는 번뜩이는 통찰에 몰입하면서 제시하는 아이디어를 통해 우리 민족의 분단을 떠받치는 국제법적 기반이 대단히 허술하고 통일에 대한 열망을 실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민족 안팎의 법체계가 전혀 구비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생각이 미쳐서는 거의 기절할 위기를 느낀 경험이 있다.



곰곰 생각해 보라. 만약 북한에 통치 공백이 발생할 경우 과연 북한 땅에 우리 대한민국 국군이 진주하더라도 주변 나라에서 아무 문제도 없다고 할 것인가?



그리고 북한 사람들이 이런 문제제기 자체를 기분 나쁘다고 하면, 그들 구미에 맞게 거꾸로 생각해도 민족문제의 취약성은 그대로 남는다. 즉, 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 대한민국 남한 땅이 역시 통치 공백이 될 경우 과연 이 땅에 대한 영유권과 통치권은 자연스럽게 북한에 넘어가게 되어 있는가?



어느 경우에도 남북한이 모두 대한민국이나 조선인민공화국의 상위 개념인 ‘한국 민족’(Corean Nation) 또는 ― 1950년 10월 유엔 결의문대로 ― '한국 국가‘(State of Corea)에 귀속되리라는 것을 보장할 국제법적, 국내법적 장치는 아직 구비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위기에 봉착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 위기이다.



독일의 경우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의 최대 결실이 1973년의 동서독 ‘기본조약’(Grundlagevertrag)이다. 이 법은 동서독 국회에 의해 ‘통과’되어 동서독 국내법의 위상을 갖춘 ‘실정법’일 뿐만 아니라, 양 국가의 국회가 동시에 비준한 ‘조약’이었고, 2차대전 4대 승전국의 승인을 받은 ‘국제법적 조약’이었다. 이 조약에 따라 동서독은 어떤 경우에도 ‘독일 민족’의 것임이 ‘법적으로’ 보장되었다. 남북한은 과연 그런가?



바로 이 글도 실릴 데일리서프라이즈 인터넷 화면 기고문으로 강정구 교수 문제가 처음 불거져 나올 때부터 사태의 추이를 주목하면서 나는 제발 정치권만은,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한나라당만은, 그의 구속을 강박하지 말았으면 했다.



그리고 작년의 송두율 교수 사건의 전말을 통해 많은 경험을 축적했을 검찰이 이번에는 앞장 서서 탈보안법 상황을 민주적으로 주도해 나가는 성숙함을 보이기를 기대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은 체제 운영의 책임 정도에서 그 급수나 역량이 한참 낮은 수준에 있는 경찰 수준에서 올라오는 구속 품신은 강 교수가 감내해야 할 이 시대의 한계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기대를 뒤엎고 한나라당은 원내대표가 국감장에서 검찰을 강박하고, 당대표까지 나서서 국민에게 위기감을 선동하고 나섰다. 평소 하도 민생 타령으로 지새우는 정당이라 지난번 대통령의 생뚱맞은 대연정 제안을 계기로 아예 정권을 맡아보는 것이 어떠냐고 방송 토론 때마다 한나라당의 그 알토란같은 의원들에게 권해보던 처지로서는 참으로 무색한 정치적 저능성의 표출이다. 민생 제치고 컬럼 하나에 목숨 걸고 달겨드는 그 모습에 정치적 품위라고는 약에 쓸래야 찾을 수도 없다.



충분히 여유를 갖고 음미할 수 있는 한 강장한 학자의 컬럼 하나를 물고 늘어져 멋대로 그 내용을 왜곡, 과잉해석하면서, 결국 국가 변란 또는 체제 도전이라도 발생한 것처럼 호들갑 떠는 작태를 보면서 ‘위기인 경우’와 ‘위기 아닌 경우’를 판별해서 말할 줄도 모르는 이런 정치꾼들에게 우리 대한민국을 맡겨야 하는가 하는 비감함이 든다.



강 교수 글 하나로 북한 특공대라도 휴전선을 넘어 침투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반란이라도 일어날 기세라는 말인가? 아무리 받아들일 수 없는 극단적인 언동에 직면해서도 흔들리지 않고 그 진의를 파악하여 자기 정치에 보태는 ‘성찰적 정치인’이 우리 정계에 이다지도 없다는 말인가?



아직도 북한 공포증이나 대북 패배주의에 사로잡혀있는 순박한 대중에게 근거 없는 공포심을 환기시켜 국가적 불안을 조성하는 데 설사 성공했더라도 그런 대중에게 과연 자신 있게 북한 문제에 맞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적 정체성의 정치적 내용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드는 수구우익의 망동에 시민적 자신감이 한없이 위축될까 두렵다.



대한민국이 보다 많은 자유와 보다 높은 민주주의와 보다 풍요로운 복지의 나라로서 평화통일을 주도하길 바라는 입장에서 이 10월은 참으로 잔인한 달이 되고 있다.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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