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안지명님이 제기하신 화두에 대한 저 나름의 생각을 써볼까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정치가 - 실생활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놀이라는 의미에서의 - 오락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음악 전문가들, 그리고 매니아들은 수많은 작곡가와 연주가에 대해 꿰고 있어야겠지요. 정치에 대해 연구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깊이 알고 대처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수많은 정치인과 정파에 대해서, 그들의 과거 행적에 대해서 꿰고 있을 겁니다. 저는 이들이 우리 사회의 문화, 그리고 정치발전을 위해 필요한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에 대해 꿰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 물론 일부는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만 - 정치를 오락으로 보기 때문에 그런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어쩌면 정치의 폐해를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그 개선에 힘을 쏟고자 신문의 정치면을 들여다보고 정치인들의 행적을 머리속에 담아두는 사람들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많이 봐 왔습니다.
저도 정치를 바둑의 대국을 관전하는 것처럼 즐기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고 나의 삶이 타인의 삶과 뗄 수 없게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 인간은 모두 타인의 운명에 책임져야 할 몫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깊이 자각하는 사람이라면 국내정치든 국제정치든 정치를 흥미거리로 간주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치에 대항해 레지스땅스 운동을 벌였던 사르트르나 앙드레 말로, 드레퓌스 사건에 분노했던 에밀 졸라 같은 사람들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겠지요. 우리 사회라고 그런 자각을 가진 사람들이 없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네요.
수단에서 무수히 학살되고 있는 흑인들, 굶주림에 지쳐 어느 거리에 쓰러져있는 북한 주민, 광주에서 학살당한 분들의 가족들, 이들을 머리에 떠올리고도 정치를 흥미거리로 여길 수는 없다고 봅니다.
물론 많은 정치인들과 매스콤, 사이비 지식인들의 꼼수에 의해 대중이 가상적 정치현실 속에 갇혀 정치적 열광에 사로잡힘으로써 실제로는 장기판의 말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만 바로 이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정치를 면밀히 관찰하고 머리속에, 그리고 가슴 속에 깊이 새겨두는 사람들은 꼭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칼 바르트라는 개신교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더군요. "기독교인은 신문을 성서처럼 곁에 두고 읽어야 한다." 저는 이 말이 기독교인들 한테만 해당되는 금언은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학창시절 읽었던 토마스 만의 어떤 글 내용이 생각납니다.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할 수 있었던 건 독일 지식인들이 정치를 교양있는 사람들이 관심을 둘만한 일이 아니라며 경멸했기 때문이라고 썼더군요.
프랑스지식인들이 현실정치의 문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행동으로 대처해 갈 때 독일 지식인들은 현실과 유리된 관념적 '교양'의 세계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 20세기에 프랑스 사회와 독일 사회가 다른 길을 걷게 된 중요한 원인이라고 분석한 글도 다른 곳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정치가 인간생활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못하지만 인간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영역 중 하나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치를 경멸하는 '교양'이나 교양을 가볍게 여기는 정치나 인간의 삶에 위협이 되기는 마찬가지라고 믿고 있습니다.
P.S.
제가 글을 쓰는 사이 주원님이 지명님의 글에 매우 날카로운 댓글을 다셨네요. 저도 주원님이 지적하신대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가 죽고 살기식이 되는 것에는 매우 큰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무력(武力)이 아닌 담론의 정치이기 때문에 개방적 대화와 토론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난 몇년간 우리 사회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은 평상적인 수준을 넘어선 부정적 모습을 보여왔고, 이것이 많은 온라인 상의 정치토론에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고 생각되네요.
정치가 중요한 문제라고 해서 언제나 서로 죽기 살기식으로 싸워야만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제가 정치를 중요한 영역이라고 표현한 것은 '인간의 실생활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치기에 누구나 책임감을 갖고 그리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사생결단식 정치활동을 지지해서가 아니라는 점을 부연해두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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