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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로저스 LS5/8 사용기
HW사용기 > 상세보기 | 2014-04-01 10:32:21
추천수 92
조회수   8,466

제목

불멸의 로저스 LS5/8 사용기

글쓴이

강종완 [가입일자 : 2009-04-05]
내용









[클래식 애호가가 원하는 스피커란,]





안녕하세요. 강종완입니다.



셀레스천(Celestion) 스피커 사용기를 작성한 지가 오래 전으로 느껴집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네요.

셀레스천을 접하고 처음 느꼈던 비전(vision)과 독특한 음색에 매료되어 모델을 수집하고, 글을 많이 썼던 기억입니다.

이 후에 다른 몇가지 스피커를 들였고, 내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저는 오디오파일(audiophile) 이라기보다는, 음악 애호가에 더 가깝기 때문에, 제가 원하는 소리가 비교적 명확하게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스피커를 기변하는 과정은 바로 제가 원하는 소리를 제대로 울려줄 스피커를 찾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기준은 언제나 음악회에서 듣던 그 음색이었습니다.












음악 극장에서 듣는 음색도,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다르고, 빈 슈타츠오퍼와 런던 코벤트가든이 다릅니다. 게다가 그 날의 청중들의 상태에 따라서도 다르게 다가옵니다. 이러한 모든 변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극장에 갔을 때 기대할 수준의 음은 어느정도 타협점이 있었고, 바로 이러한 것이 내가 원하는 소리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결국 내가 원하는 소리란, 소리 성부의 왜곡이 없을 것, 악기 고유의 음색을 그대로 울려줄 것, 일정 공간 이상의 커다란 울림이 울려 줄 것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일정 공간'이라는 것은 마치 음악홀에서 듣는 것 처럼, 오케스트라의 울림이 실제로 방안에 울리는 듯한, 또는 스피커 인클로져 안에서 넉넉하게 울리는 느낌 정도로 묘사할 수 있겠습니다. 요는 스피커의 인클로져가 커야한다는 것입니다.














[로저스 5/8, 그러나 정확하게는 BBC 5/8!]





어떠한 북쉘프 스피커를 들어도, 결국은 작은 인클로져의 한계를 절감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로저스 5/9 에 대하여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5/9의 형님 뻘인 5/8을 알게되었습니다. 일반 북쉘프 보다 큰 5/9(280*275*460), 그리고 이 스피커 보다 훨씬 큰 용량의 인클로져로 설계된 5/8은, 바로 내가 원하던 크기의 스피커였습니다. 게다가 5/9에서 느꼈던 음색, 성향이 매우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고민하지 않고 구입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영국 현지에서 구하여, 판매자와 거의 실시간 메시지 수준으로 상담을 하였고, 운이 좋게도 훌륭한 5/8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나무 상자로 실려오는 5/8을 맞이하였을 때의 감회가 새록새록합니다.












로저스 5/8과 5/9는 1980~90년대에 영국 BBC 방송국에서 디자인 설계한 모델입니다. BBC는 자신들이 스튜디오에서 사용할 스피커를 만들기 위하여 로저스라는 스피커 회사와 손을 잡고 생산한 것입니다. 애초에 5/8을 만들고, 이후에 좀 더 작은 공간에 사용할 스피커의 필요성이 증대되어, 5/9를 설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로저스 5/8과 5/9는, 로저스 스피커의 다른 모델에 비하여 완성도나 소리 성향에 있어서 더 뛰어난 특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로저스 5/8, 5/9라고 하기 보다는 BBC 5/8, BBC 5/9라고 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5/8과 5/9에는 BBC 엔지니어들의 입김이 절대적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사실, 로저스 5/8을 들이고 나서부터, 저는 스피커 구입을 접게되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으나, 그만큼 로저스5/8은 제가 원하는 성향에 거의 완벽하게 부응하였기 때문입니다.



5/8을 끝으로 더이상 다른 모델을 구입할 것 같지도 않고, 구입한다고 해도, 그 절차에 벌써 귀찮음이 느껴지는 상황이지만, 이렇게 5/8에 대하여 사용기를 작성하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스피커라는 것은 결국 음악을 울림으로써 그 감동을 전달하는 매개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 스피커에 대한 사용기와 느낌도 결국은 음악 평론처럼 분석적이면서도 감성적인 부분이 들어가는 것이 숙명일 것입니다. 더욱이 로저스 5/8과 같이 역사와 비전이 뚜렷한 모델을 묘사하는데에는 객관적인 설명을 초월하는 감성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로저스 5/8을 조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페라 돈 조반니와 로저스 5/8의 소리 성향]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사용기를 작성하고자 합니다.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 이 오페라의 굳이 성향을 따지자면, 부파(buffa)와 세리아(seria)의 중간(giocoso). 그러니까 희극적인 요소와 비극적이 요소가 섞여 있는 오페라입니다. 그러나 서곡부터 시작되는 장중하고 암울한 멜로디, 돈 조반니의 파멸, 그리고 조반니의 엽기행각 등은 오페라의 분위기를 전반적으로 어둡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분위기는 로저스의 음색과도 어울리는 느낌이 듭니다. 붉은 빛깔의 현악기 질감이 강하게 느껴지면서도 울림 자체에서 어느정도 여유가 있는 로저스 5/8 특유의 울림은, 돈 조반니의 근본적인 어두운 느낌을 표현하기에 적당하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나타나는 밝고 아름다운 아리아나, 플룻, 클라리넷과 같은 목관악기 묘사에도 굉장히 자연스럽고 밝은 성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페라 돈 조반니의 중요한 몇 장면과 함께 로저스를 감상하고자 합니다. 다만, 5/8에서 굉장히 인상적인 피아노 페달 부분은 마지막에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을 들어보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곡의 분위기를 명확하게 조성하는 서곡, 현악기 질감의 5/8]







오페라 서곡의 강력하고 암울한 분위기의 화음은 관객들을 압도합니다. 그 화음에서 나타나는 돈 조반니의 패기와 명징함, 그리고 그 이면에 나타나는 욕망에 대한 음흉하고 잔인한 욕구에 청중들은 몸서리를 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공간감. 처음 꽈광 하고 울려주는 오케스트라의 화음은 방안 전체를 꽉 채워야 하며, 동시에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첼로와 베이스의 멜로디는 장중하게 깔려야 합니다. 북쉘프로 들었을 때, 그 어떤 스피커로도 만족하지 못했던 곡 중의 하나가 바로 돈 조반니의 서곡인 것도, 바로 이런 특성 때문일 것입니다.





반대로 5/8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것이 바로 커다란 인클로져에서 나오는 울림이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커다란 소리가 인클로져 구석구석, 모서리까지 퍼져 나가서, 마치 내 자신이 인클로져 안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커다란 울림은 단순히 인클로져의 크기 뿐 아니라, 큰 크기를 자연스럽게 울려주는 스피커 성향 덕분에 자연스럽게 들렸습니다. 게다가 로저스 특유의 바이올린 음색, 섬유질의 음색이 적절히 가미되어, 오케스트라 음의 짜릿함이 다가왔습니다.





한 가지 더. 바로 각 악기의 위치 설정을 느낄 수 있었는데, 가령 오케스트라 가운데 뒷 부분에 위치한 목관악기, 왼쪽에 위치한 바이올린, 오른쪽에 위치한 첼로의 소리가 좀 더 명확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점은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위력적인 오케스트라 음악에서도 느낄 수 있었고, 이러한 '공간감' 이 오케스트라의 음을 더욱 더 활기차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마치 오케스트라 전체가 5/8인클로저 안에 들어가서 연주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잠깐, 로저스의 음색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얘기해 보면. 로저스 5/8, 5/9​의 소리성향은 한 마디로 말하면, 현악기의 질감의 음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현악기의 질감은 파가니니에서 느껴지는 고음의 바이올린 음색이라기 보다는, 마리아 본 베버의 대규모 오케스트레이션에서 울리는 일사불란한 바이올린 음색, 거기다 팀파니, 트럼펫, 호른의 위력적인 펼침을 받아낼 수 있는 커다란 인클로져의 능력. 이 모든 것의 조화로운 연주가 5/8의 느낌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기존의 북쉘프에서, 그리고 같은 소리 성향의 5/9에서 조차도 만족스럽지 못하던 대규모의 오케스트라의 울림이 5/8에서는 한 층 고양되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바이올린 고음 또한 잘 세공되어 나오고 있어서 광활한 연주장 내에서 연주하는 솔로 바이올리니스트를 상상하시면, 바로 그것이 5/8의 바이올린 음색이겠습니다.












[단 한 번 등장하는 사랑스러운 아리아, 목관악기의 자연스러운 울림이 인상적인 5/8]







5/8이 훌륭한 점이라면, 단순히 인클로져의 크기가 커서가 아니라, 큰 인클로져를 훌륭하게 울려줄 수 있는 스피커의 설계일 것입니다. ​통울림하면 우리는 하베스(Harbeth)를 떠올릴 수 있지만, 5/8의 통울림은 하베스처럼 인위적이지 않으며, 좀 더 자연스럽고 여유로운 소리가 납니다. 목관악기의 태생적 특성을 생각해보면, 플룻과 클라리넷과 같은 악기는 통울림이 뛰어난 스피커와 궁합이 맞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베스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기타 소리에 관심을 보이시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리라 생각합니다.





오페라 전체에서 단 한 번 등장하는, 밝고 행복에 겨운 사랑의 아리아는, 비극의 여인 돈나 안나(Donna Anna)가 부릅니다. 극 중에서 돈 조반니에게 커다란 봉변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신의 약혼자를 위하여 부르는 사랑의 아리아는, 자신의 남자를 위로하고, 동시와 그와 함께할 미래에 대한 희망, 설렘, 그리고 환희의 감정까지 느껴집니다.





안나의 가슴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클라리넷과 플룻의 음색은 5/8의 인클로져를 거쳐 매우 자연스럽게 울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감동을 받는다면, 그것은 스피커의 성능이 훌륭해서라기 보다는, 원래 연주 자체가, 악기 고유의 음색이, 그리고 모차르트가 악기 사용을 완벽에 가깝게 연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정도로 5/8의 목관악기 울림은 대단히 자연스럽고 만족스러웠습니다. 플룻 음색에서 눈부심을 더하거나 화려하게 장식하기 보다는, 본연이 울림을 좀 더 크고 명확하게 울려줌으로써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여기서 따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바로 클라리넷의 음색입니다. 모차르트가 클라리넷을 특별히 사랑한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클라리넷이라는 악기는 참으로 매력적입니다. 저음부터 고음까지 주욱 불면 정말 마법과도 같이 음색이 수백가지가 나타납니다. 모차르트는 이러한 점을 포착하여 클라리넷을 여성성의 상징으로 즐겨 사용하였습니다. 5/8은 클라리넷을 위한 스피커입니다. 그 정도로 클라리넷의 특유의, 가슴을 뒤흔드는 저음, 맑고 부드러운 느낌의 중음과 환희의 찬가로 불리는 고음이 정말이지 완벽에 가깝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는 넉넉한 인클로져, 커다란 통을 자연스럽게 울리는 네트워크의 의도 등이 한데 어울려 만들어낸 하나의 축제입니다. 만약 5/8의 진가를 느끼고 싶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클라리넷 음악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안나의 화려한 콜로라투라. Strong, loud, heavy voice를 가지고 있는 프리마돈나가 부르는 고음의 콜로라투라는, 극 상황을 생각해보면 사치스러울 정도로 눈이 부십니다. 5/9에서는 다소 거친면이 느껴지던 여자 가수의 음성이 5/8에서는, 목소리의 울림에서 거친 면이 다듬어져 나온 느낌이 들었습니다. 음악회 홀 안을 가득 메아리 치는 프리마돈나의 목소리, 환상의 콜로라투라의 끝으로 우뢰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나올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












[달밤의 관능적인 세레나데, 맑고 또렷한 만돌린의 음색을 날카롭게 다듬는 5/8]







돈 조반니가 여인을 유혹하기 위하여, 달밤에 부르는 세레나데는 매우 관능적인 작품입니다. 반주로 나오는 만돌린의 음색 하나하나는 밤 하늘의 별이 되어 낭만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돈 조반니의 달콤한 선율은 매혹적으로 들립니다. 바리톤 돈 조반니의 음색은 마치 음표 하나하나를 감싸는 듯 하고, 그렇게 울리는 바리톤의 음성이 떨리는 순간은 바로 여성의 나체가 떠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관능적입니다. 모차르트는 이 순간 아마도 섹슈얼한 이미지를 떠올리며 작곡했을 것입니다. 마제토가 ​산통을 깨트리지만 않았다면, 진도(?)는 더 나갔을 것입니다.





만돌린 특유의 똘망똘망한 울림은 5/8에서 좀 더 해상력있고 명확하게 들렸습니다. 아마 5/8을 감상하면서 느낄 가장 큰 반전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이가 20년이 넘은 스피커인데도 불구하고, 성격은 다소간 현대적일 정도로, 그렇게 만돌린의 울림이 날카롭게 들렸습니다. 이것은 쳄발로의 음색에서도 마찬가지로 들렸는데, 다만 커다란 인클로져의 덕택으로 쏘는 듯한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내 귀에 쏘는 대신 그 울림이 커다란 스피커안에서 돌고 돌아, 감상자는 그것을 보면서 마치 교회 안에서 음악을 듣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됩니다.





5/8의 현악기적인 소리 성향, 그리고 금속성의 울림, 목관악기의 울림을 적당하게 보조해주는 탄탄한 인클로져의 특성에도 보듯이, 바리톤의 음색, 강력한 베이스의 외침이 매우 실감나게 들렸습니다. 사실, 앞의 소프라노 음색에서도 실감나는 느낌은 매우 비슷하였는데, 마치 내 앞에서 오페라 가수들이 마이크를 붙잡고 부르는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맞을 듯 합니다.










[돈 조반니, 그는 천하의 난봉꾼인가? 외로운 구도자인가? - 어지러운 죽음의 선율과 강렬한 외침을 감당해내는 5/8의 스케일​]







드디어 지옥에서 등장한 코멘다토레. 그는 돈 조반니를 붙잡고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 신적 존재에 버금하는 파워. 그러나 돈 조반니는 끝까지 자신의 명징함을 잃지 않으며, 자신의 신념을 고집합니다. 노(No)! 근엄하고 강력하게 심판하려는 코멘다토레와 자신의 가치를 끝까지 지키려는 돈 조반니의 발악, 그리고 그 아래에서 벌벌 떨며 지켜보는 레포렐로, 죽음이 드리워진 검은색의 어지러운 선율은 무대를 휘감고, 강렬한 트럼펫은 죽음의 문들 열어놓고야 맙니다.





바로 이 상황이 5/8의 가치를 드러내 보이는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멘다토레의 근엄하고 높은 꾸짖음, 돈 조반니의 비명, 레포렐로의 신음소리, 그리고 그 아래에 드리워지는 죽음의 D단조 선율은 각각의 자신이 있어야할 자리를 인클로져 안에서 찾았습니다. 그 모든 소리와 울림은 각각의 성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모든 어지럽고 강력한 화음은 풍부하고 완벽하게 울리고 있었습니다.





돈 조반니는 불구덩이로 떨어지고, 그의 외마디는 저 멀리 사라져버렸지만, 그 여운은 모든 청중들 가슴 속에 남아있습니다.



돈 조반니의 최후 뒤에 찾아오는 아주 짧은, 지극히 짧은 적막은 바로 우리 모두의 여운이며, 오페라 돈 조반니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모호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로저스 5/8과 5/9를 처음 접하고 느꼈던 가장 강렬한 인상도 바로 이런 적막이었습니다. 강렬한 오케스트라의 펼침 뒤에 나타나는 적막. 그 완벽한 적막으로 로저스는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현악기 질감의 강력한 울림, 세밀한 표현, 풍부한 스케일, 그리고 그 아래에 깔려있는 BBC 방송국의 비젼.










[피아노의 페달링 음색까지 담아내는 5/8]





피아노의 전신인 하프시코드가 연주되던 17, 18세기 때만 하더라도, 이 악기가 이렇게까지 검은 강철의 머신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청중의 확대와 늘어난 음악적 표현의 욕구, 그리고 넓어진 연주홀을 꽉 메울만한 성량의 필요 등으로 피아노는 개량의 개량을 거듭하여 지금의 '기계'로 변신하게 됩니다. ​특히 페달의 사용은 피아노의 성량을 압도적으로 크게 하였으며, 오케스트라와도 맞먹을 만한 스케일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은 이러한 피아노의 특색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곡입니다. 3악장 도입부의 피아노 솔로는 너무나 익숙한 멜로디의 작품이지만, 이때까지 스피커를 통하여 감상하면서 한 번도 페달링의 사용이 느껴진 적이 없었습니다. 5/8을 들여놓고 들어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피아노 페달의 '발견' 이었습니다. 페달에 의해 루바토 처럼 연결되는 음과 음사이의 간극이 매우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5/8의 커다란 인클로져 때문인지, 아니면 스피커 디자인 상의 설계인지 모르겠으나, 이 점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피아노 ​음색 자체에 대한 연주도 상당히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렇다고 맑은 느낌의 울림은 아니지만, 왜곡이 없고 꾸밈이 없는 피아노 음색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저음의 피아노 음색은 다소간 더 강하게 강조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강한 저음, 원인은?]





간혹 특정 음반에서는 저음이 강하게 들리는, 마치 부밍음과 같이 음이 크게 울렸습니다. 현재 제가 5/8을 사용하는 공간이 협소한 것이 하나의 원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 인클로져의 커다란 울림을 자연스럽게 울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공간이 일정 크기 이상이 되야 할 것 같습니다.







[자연스러운 개성과 현악기적 소리 성향이 확실한 5/8, 그만큼 갈리는 호불호]





현악기 질감의 느껴지는 소리 성향, 커다란 인클로져 안에서 자연스러운 연주의 영상을 만들어내는 5/8은 그 상태로 만족스러웠습니다. 이 이후로 딱히 다른 스피커를 찾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할 만큼, '보수적인' 클래식 애호가의 입장에서는 훌륭한 스피커였습니다. 게다가 오래된, 크기가 큰 스피커에서 느끼기 어렵지만, 5/8 에서는 강하게 느껴지는 현악기의 탄력적 음색은 오케스트라적인 쾌감이 느껴지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생산된지 20년도 넘은 스피커이기 때문에 소리 성향이 현대적인 사운드를 재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클래식 애호가(그것도 보수적인 애호가)로서는 그다지 요구하지 않는 현대적인 사운드는 5/8의 사운드와 다른 면이 있습니다. 칼같은 해상력이라던지 각각의 성부를 다듬는 세련됨, 퍼지지 않는 탄탄한 저음과 같은 현대적인 사운드를 5/8에서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런 방향으로 가치를 잡아가시는 오디오 파일들은, 5/8에서 다소 심심한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딱히 어떠한 단점도 없지만, 그렇다고 장점이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죠. 5/8의 재미는 거대한 오케스트라에서 울리는 각각의 악기들의 자연스럽고 풍부한 울림, 그리고 커다란 인클로져에서 나오는 광활한 울림인데, 음악의 장르나 성향이 맞지 않는다면 5/8은 심심합니다. 현대의 대용량 스피커와 비교해본다면, 5/8은 상대적으로 클래식한 느낌이 듭니다. ​





​디자인도 호불호가 갈린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같이 성향이 클래식한 것을 추구하시는 분들 께는 이것보다 멋진 '작품'이 없지만, 현대적이고 21세기의 재해석을 원하시는 분들께는, 보수적인 디자인이 성에 차지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로저스 5/8은 모든 스피커의 출발점이자 교과서​]





5/8은 많은 스피커 설계자에게 있어서 참고서와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꼭 5/8이 아니더라도 5/8과 같은 성향의 스피커가 모든 스피커의 출발점이 되었을 거라 거의 확신합니다. ​딱히 어느 한 부분에서 모나지도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밸런스와 자연스러운 소리의 성향은 말 그대로 음악의 출발점이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이러한 성향을 접한 많은 스피커 설계자들은 다양한 측면에서 자극을 받고 창의성을 발휘하였을 것입니다. 각 성부의 독립성을 좀 더 부각시켜볼까 라던지, 저음을 좀 더 세련되게 부각시켜 보자, 하는 식으로 말이죠.





시간을 넘어서서 사랑받는 또 하나의 모델 AR시리즈와 비교해보더라도, BBC 5/8은 ​좀 더 현대적인 사운드에 지향점을 두고 있으면서도 현악기 본연의 울림에 충실한 느낌입니다. 여기서 '현대적'이라함은 위에서 말한 21세기의 테크노적인 사운드를 말하는 것은 아니며, 일반적인 현악기적 사운드에 근접한 소리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5/8에서 나오는 바이올린의 소리를 듣더라도, 이 음악이 20년 전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불멸의 로저스 5/8​, 클래식 연주자 모두의 극장]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는 애초에 만들어졌을 때 부터 완벽했습니다. 노래하는 듯한 음색, 흐느끼는 듯한 선율은 멜로디를 연주하기에 적합하였으며, 이런 특유의 사운드는 단점을 찾기 어려울 만큼 훌륭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다른 악기와 달리, 바이올린은 처음 탄생했던 그 모습 그대로 유지가 됩니다. 로저스 5/8도 애초에 그 음색이 현대의 클래식 악기(17,18세기의 악기들과 비교해서)에 완벽하게 부응하였기 때문에, 시간이 흐른 현재에도 여전히 감동을 줍니다. 스피커가 마치 악기와 같다고 느낀 시점도 바로 로저스 5/8, 5/9를 들이고서 부터입니다.







시대에 따라서 요구하는 사운드와 추구하는 음의 분위기가 있는 반면에,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음색과 효과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바흐가 1717년 쾨텐에서 사용한 바이올린과, 1964년 바르톡이 사용한 바이올린은, 그 조성은 다를지언정 기본적인 음색은 동일하였습니다. 베를리오즈가 각 악기의 음색적 특성을 발견하고, 드뷔시가 화성의 흐름을 파격적으로 변화시키고, 쇤베르크가 조성을 없애버렸을 때도 기본적인 음색이란 존재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로저스 5/8은 클래식 음악의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담아내는 훌륭한 화구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다양한 음악적 시도가 나타나겠지만, 로저스 5/8은 불멸의 아우라를 내뿜으며, 클래식 연주자 모두의 극장이 되었습니다.













Criticized by Kang JongWhan, vivaldia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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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훈 2014-04-01 10:56:54
답글

손잡이 달린 수피커랑 그 밑에 꼼쳐둔 앰프 줄서봅뉘다 ㅡ,.ㅡ;;<br />

김희수 2014-04-01 12:02:28
답글

와... 글 정말 잘 쓰시는군요. 좋은 사용기 잘 읽었습니다.

이장호 2014-04-01 15:15:26
답글

맛깔나는 사용기네요.... 덕분에, 장터에 나온 5/8 놔둘때도 없으면서 한동안 고민했습니다. ^^<br />
강종완님에게 시집간 저 스피커도 주인을 잘 만났네요.. 이렇게 사랑해주고~

이웅현 2014-04-01 17:39:31
답글

한번 들어봤으면 싶은 스피커입니다..너무 잘 생겨보여서인지..<br />
<br />
3/5하곤 확실하게 다른가보네요(체적이 다르니 다를수밖에 없겠지만)....피아노 페달링이라..감이 오는 사용기네요^^

윤석권 2014-04-01 18:30:43
답글

언제쯤 사용기 올리시나 했는데 <br />
역시 풍부한 음악적 감각이 느껴지는 좋은 글입니다.<br />
5/8 이나 5/9에는 사이러스가 한 몫을 하는거죠?<br />
저도 결국 5/8로 가야할까요..

강종완 2014-04-01 19:17:23
답글

백경훈님/ 혹시 이사가게 되면 올리겠습니다.^^ 당분간은 좀 더 아까주려구요. <br />
<br />
김희수님/ 감사합니다.<br />
<br />
이장호님/ 네. 5/8과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국에 있을 때 부터 워낙 정성들인 스피커라서요^^

강종완 2014-04-01 19:39:56
답글

이웅현님/ 네. 실제로 보면 정말 이쁩니다. 상당히 훌륭해요. 오. 피아노 페달링. 느끼셨군요. 웅현님께서 느낀 그대로 입니다. 북쉘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울림. <br />
<br />
윤석권님/ 윤석권님, 반갑습니다.^^ 5/8은 사이러스 입김이 덜한 듯 합니다. 그만큼 대용량이고 스피커 자체의 개성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br />
5/8과 5/9는 비슷한 듯 다른 느낌이 있습니다. <br />
5/9에서 스케일에서 아쉬움이 있으시

김장진 2014-04-04 18: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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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스 pm510s2를 한 몇년 듣다가 스펜더 BC3로 넘어 왔습니다.<br />
수지 청음실에 몇 세트가 있었지요...<br />

kids569@gmail.com 2014-04-14 18:5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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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저런 명기들을 만든던 회사가 주인을 잘못만나는 바람에.. ㅠㅠ...

이만오 2014-05-13 12:3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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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기 잘보았습니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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